파리의 밤, 알프스의 바람, 아말피의 햇살 아래에서
“익숙한 세계 너머, 나를 만난 여행”
여행은 늘 마음속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겐 그것이 생애 첫 서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였다. 3월, 겨울의 찬 기운이 물러나고 봄이 문턱에 들어설 무렵. 나는 짐을 쌌고,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을 가슴에 담은 채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창밖으로 하늘이 서서히 서구의 빛으로 물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떠나는 것 자체가 나를 한층 홀가분하게 만들었다. 익숙했던 삶의 풍경에서 벗어나, 내가 알지 못했던 공기, 언어, 표정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거리에는 오래된 것의 품격이 서려 있었다. 낯선 이방인에게조차 다정한 파리의 석양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스위스의 공기는 너무 맑아, 숨을 쉴 때마다 몸 안의 묵은 생각들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모든 것이 진하고 농밀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언성조차도 리듬처럼 느껴졌고, 음식 한 접시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 여행은 유적지와 풍경을 보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도시의 아침 냄새를 기억하고, 어느 골목의 햇살 각도까지 마음에 품었다. 카페에서 마신 커피의 쌉싸름함, 다정한 시선으로 말을 걸어오던 가게 주인의 표정, 저녁 무렵 젤라또를 들고 서성이던 광장. 작은 장면들이 모여 나의 첫 서유럽은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기억이 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여행을 통해 ‘낯선 세계는 결국 나를 더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한 일상의 색채가 흐릿해질 무렵, 나는 저 먼 서쪽 끝에서 내 안의 작은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기록이다. 감각의 층을 지나 마음으로 새겨진 순간들, 도시의 리듬 속에서 발견한 나의 표정. 어쩌면 당신에게도 잊고 지낸 여행의 설렘을 다시 꺼내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프랑스]
1장. 시간을 걷는 도시, 파리의 아침
“파리의 아침 공기는 조금 느리게 흐른다. 마치 시간을 되새김질하듯, 모든 것이 서두르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내려 파리의 거리에 첫 발을 디뎠을 때, 공기가 다르다는 걸 곧장 느낄 수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드러움. 흐릿한 회색빛의 하늘 아래, 거리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한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엔 분명 생동감이 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 순간처럼.
호텔에서 나와 마레 지구를 걷는다. 돌바닥이 깔린 좁은 골목길, 문득 고개를 들면 오래된 건물의 창틀마다 꽃이 피어 있다. 지나가는 이들 대부분은 조용하고 빠르지 않다. 걸음에도 말에도 어딘가 ‘지켜야 할 리듬’이 있는 듯했다. 이 도시에선 속도를 내는 것보다, 멈추는 법을 배우는 게 먼저인 것 같다.
길 모퉁이 작은 빵집 앞엔 아침을 사려는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바게트를 품에 안고 돌아가는 한 노인의 표정에서, 파리라는 도시의 품격이 느껴졌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얼굴을 스친다. 창밖으로는 회색 도시가 조금씩 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이른 아침의 파리는 그렇게, 아주 천천히 깨어난다.
노트르담 대성당 근처에선 센강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강을 따라 걷는 사람들, 손을 잡은 연인들,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 하나. 이 풍경은 오히려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도시처럼, 처음 만났음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친밀함이 묻어났다.
파리의 아침은 놀라울 정도로 사적인 시간이었다. 관광객의 분주한 발걸음이 본격적으로 붐비기 전, 나는 잠시 이 도시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골목의 그림자와 햇살, 빵 굽는 냄새와 묵직한 성당의 종소리.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면, 이 하루의 시작이 나의 모든 여행 중 가장 조용하고도 깊은 기억으로 남았다. 파리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고, 나는 그 느린 호흡에 자신을 맡길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2장. 루브르의 창 너머, 인류의 얼굴들
“예술이 말을 걸어올 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한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게 된다.”
루브르 박물관은 ‘보러 간다’는 말만으론 부족하다. 그곳은 진입하는 순간부터 의식을 전환해야 하는 세계다.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유구한 시간의 축이 내 뒤에 길게 드리워진다. 마치 돌이 된 시간들이 수만 개의 눈으로 관람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관람객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며 가장 먼저 느낀 건, 이곳엔 ‘정적의 밀도’가 있다는 점이었다. 말소리가 줄어들고, 사람들의 걸음은 느려진다.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멈춰 서는 것’이 된다. 그런 정적인 순간 속에서 우리는 질문을 받는다.
“이 얼굴, 이 손짓, 이 시선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모나리자의 미소 앞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 모두가 카메라를 들고 있지만, 정작 눈으로는 더 오래 바라본다. 그 작은 미소 하나에 담긴 시대의 미묘함, 여성이라는 존재를 둘러싼 수백 년 전의 시선과 지금의 내가 교차되는 순간. 그 시간은 어떤 설명도 없이 다가왔다.
루브르는 단지 예술품의 보관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가 남긴 가장 정제된 질문과 응답의 장소였다. 사자 머리를 한 이집트의 신상, 비너스의 부드러운 곡선, 들라크루아의 격정적인 붓질. 나는 회랑을 따라 걸으며, 한 문명에서 또 다른 문명으로 건너뛰는 기분을 느꼈다. 내 안의 사고마저 시대에 따라 변조되는 듯했다.
잠시 창가에 서서 빛이 쏟아지는 회랑을 내려다보았다. 루브르는 어쩌면 예술을 보는 공간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 존재하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림들을 본 것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들이 나를 바라보는 경험을 했다. 그 응시 속에서, 나는 이 여행이 단지 유럽의 경치를 따라가는 여정이 아니라, 인간의 깊이를 마주하는 시간임을 깨달았다.
루브르의 마지막 전시실을 나설 때,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다시 뒤돌아 그림을 바라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네가 있었기에, 내가 여기까지 왔어.”
3장. 베르사유, 화려함에 깃든 고독
“화려한 것들일수록, 그 이면엔 고요한 고독이 숨어 있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베르사유로 향할 때,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점점 도시의 윤곽을 벗어났다. 빽빽한 건물 대신 부드러운 들판과 작은 시골 마을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문득, 이토록 조용한 길 끝에 저토록 거대한 권력의 상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궁 앞에 다다랐을 때, 모든 것이 황금으로 빛나고 있었다. 대문, 창틀, 지붕의 끝자락. 햇빛이 닿는 곳마다 번쩍이며 웅장한 위엄을 내뿜는 건축물. 베르사유 궁전은 단지 ‘궁전’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이었다. 권력, 과시, 통제, 그리고 고립.
궁 안으로 들어서자, 그 유명한 ‘거울의 방’이 길게 펼쳐졌다. 정면으로 마주한 유리창은 베르사유의 광대한 정원을 끌어들이고, 반대편엔 거울들이 그 장면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그곳에 서 있는 순간, 나는 시간 속에 갇힌 느낌을 받았다.
거울 속 나와 현실의 내가 마주 보는 사이, 수백 년 전 루이 14세의 숨결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정원으로 나와 천천히 걸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연출인지 알 수 없는, 수학적으로 정렬된 수풀과 분수들. 아름다움은 통제된 구조 속에서도 살아 있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롭게 산책하고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내 눈엔 베르사유가 마냥 화려하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 찬란함의 이면엔, 스스로를 고립시킨 절대왕정의 마지막 불꽃이 남아 있었다. 수많은 사치와 예술, 그리고 민중의 침묵.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얹힌 공간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고요’를 느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많은 것을 만들어냈을까. 남기기 위해서였을까, 잊히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베르사유는 그 답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 무언의 침묵 속에서 나는 나름의 답을 하나쯤 꺼내고 있었다.
4장. 파리의 마지막 밤, 불빛과 이별
“어떤 도시는 떠날 때 비로소 내 안에 들어온다.”
파리의 마지막 밤은 예상보다 더 조용했다. 거리엔 적당한 바람이 불었고, 하늘은 온통 짙은 남청색이었다. 낮에 걸었던 골목, 고개를 들면 보이던 회색 지붕들, 브루톤 향이 흘러나오던 카페들. 이제 그 모든 것이 조금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떠난다는 건, 더 많이 기억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에펠탑이 점등되는 순간, 파리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마치 도시 전체가 빛으로 감싸지는 느낌. 다리 위에 멈춰 서서 반짝이는 강물과 불빛을 바라보았다.
센강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유람선, 손을 흔드는 사람들, 와인을 든 연인들. 모두가 그 밤의 파리와 뭔가를 나누고 있었다. 나 역시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 조용히 작별을 준비했다.
어쩌면 마지막이란 감정은,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진하게 만든다.
걸음을 늦추고 싶었고, 가로등 불빛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싶었다. 바게트 냄새가 흐릿하게 풍기고, 저 멀리에서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온다. 마치 도시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잘 가. 다시 올 거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잔을 감싸 쥔 손에 묘한 이별감이 스며들었다. 옆자리 외국인 부부는 조용히 무언가를 나누고 있었고, 나도 내 속에서 작고 단단한 감정을 정리하고 있었다.
떠나기 하루 전의 도시는, 언어보다 깊은 말로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호텔 창가에 기대어 마지막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언제 다시 이 거리를 걷게 될까. 이 공기, 이 불빛, 이 조용한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 밤, 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물 하나를 건넸다.
시간을 조금 천천히 흘러가게 하는 법.
사람과 공간을 조용히 사랑하는 법.
그리고 그리움이란 감정은, 늘 그렇게 가장 아름다운 밤에 태어나는 것임을.
이상 파리 편 끝. 곧 스위스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