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른의 시간, 인터라켄의 숨
[스위스]
5장. 루체른, 호수 위에 머문 시간
"어떤 고요는, 사람을 말없이 안아주는 힘이 있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위로가, 풍경 자체에서 스며 나올 때가 있다. 아무런 위안의 말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없는 채로. 그저 공기 속에, 빛과 그림자 속에, 물결의 잔잔한 리듬 속에 감싸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천천히 놓이는 그런 순간. 루체른은 나에게 바로 그런 고요함을 내밀었다.
루체른에 도착한 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건 공기의 결이었다. 서울에서의 공기와는 다르게, 여기는 한층 더 맑고 가벼웠다. 마치 입김처럼 투명하고, 폐 깊숙이 스며들 만큼 부드러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벼운 장막이 나를 감싸며, 이곳의 시간은 어딘가 달라진 듯했다. 도시라기보다는 하나의 풍경, 혹은 오래된 꿈속 정경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낮았고, 발걸음은 조용했으며, 거리의 나무들은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 모든 정적이 하나의 배경음처럼 깔려 있었다.
카펠교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나무로 된 고풍스러운 다리. 수 세기를 건너온 듯한 그 구조물에는 세월이 차분히 쌓여 있었다. 다리 위를 감싸고 있는 지붕 아래에는 오래된 그림들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고, 천장의 곡선은 마치 시간의 손길에 따라 구부러진 듯했다. 손으로 닿을 수 없는 과거가, 그 다리 위에 조용히 머무는 듯한 느낌. 다리 아래로는 루체른 호수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 수면 위에는 하늘도, 근처의 알프스 산맥도,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 자신도 함께 비쳐 있었다. 마치 모든 존재가 그 호수 안에 잠시 머무는 듯했다.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상이 조금씩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일상의 속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이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바람 한 줄기에도 마음이 반응하고,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설산의 흰 정수리에 눈길이 자꾸 머물렀다. 어느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고, 말보다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 루체른은 여느 도시들과 달랐다. 화려한 거리도, 떠들썩한 사람도, 과장된 상점도 없었다. 무엇을 보여주려 애쓰지 않았고, 나에게 다가오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 자리에 충실하게, 그 시간 속에 조용히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골목을 지나 찾은 찻집에 들어가,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나무 창틀 너머로 보이는 호수가 정물화처럼 고요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마주한 그 풍경은, 아무 말 없이도 하루의 긴장을 풀어주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문득 이 여행이 나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지 곱씹게 되었다. 매일같이 흘러가던 시간 속에서, 멈춘다는 것의 의미. 바쁘게 살아온 삶의 속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잠시라도 그 흐름을 바라보는 시간. 어쩌면 그것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저녁 무렵, 호수 위로 석양이 천천히 드리웠다. 햇살은 처음엔 금빛으로, 곧이어 보랏빛으로 변해갔고, 물 위에 퍼지는 색은 하루의 감정처럼 깊어졌다. 바람도, 사람도, 소리도 그 빛에 스며들 듯 조용해졌다. 파리에서 느꼈던 예술의 밀도와는 다른 종류의 감동이었다. 여기는 모든 것이 너무나 조용해서,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다. 언어를 넘어서 마음 깊숙이 전달되는 감각. 차분히 물결처럼 번져오는 울림이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다시 한번 호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물 위에 비친 가로등 불빛과 창가 불빛들이 작은 별처럼 떠 있었다. 마치 하늘의 별들이 호수로 내려온 듯, 밤하늘과 수면이 하나의 공간처럼 이어져 보였다. 그 속에서 나는 오래전 잊고 있던 감각 하나를 되찾은 듯했다.
바라보는 것.
기다리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법.
루체른은 내 안에 조용히 숨어 있던 감정을 다시 불러내 주었다. 말없이 머무는 것, 말없이 느끼는 것, 그리고 말없이 사랑하는 것의 의미를.
6장. 인터라켄, 설산 아래서 마주한 숨결
"자연이 말을 건네는 순간, 사람은 본디 자신의 크기를 깨닫는다."
나는 그때, 내 존재의 크기와 그 모든 존재들이 내게 의미하는 바를 절감했다. 자연은 그저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존재였고, 사람을 초대하는 거대한 힘이었다.
인터라켄에 닿았을 때, 나는 마치 그 풍경 속으로, 그 모든 자연의 한 부분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사방을 에워싼 알프스의 산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거대한 벽, 숨 쉬는 존재였다. 그 산들은 아무리 멀리서 봐도 다가올 수 없는 존재처럼 우뚝 서 있었다. 하늘은 그 어느 곳보다 투명하게 빛났고, 그 아래 펼쳐진 들판은 초록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진했다. 이곳은, 그 이름처럼 정말 ‘산들 사이’에 서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치 나는 산과 산 사이에 놓인 작은 점처럼 느껴졌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내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융프라우요흐를 향해 올라가는 열차에 올랐을 때,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변해갔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처음엔 평범한 숲과 들판이었지만, 점점 나무들이 줄어들고 산자락엔 흰 눈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공기는 한층 더 차가워지고, 그 차가운 기운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나는 그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열차 안의 다른 여행자들은 창가에 몰려들어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다양한 국적의 언어가 섞여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탄성과 감탄이 얽혀 나왔지만,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사진이 아니라, 이 모든 장면을 내 감각 속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내 기억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싶었다. 손끝에 닿는 공기의 차가움, 눈에 담기는 설산의 끝없는 경치, 그리고 열차의 흔들림 속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리듬을.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말없이 눈을 떴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눈 덮인 세상 속에서, 나는 그저 작은 존재일 뿐이었다. 사방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아래로 펼쳐진 풍경은 그 어떤 도시의 장관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공기는 아주 희박했고, 그 희박함 속에서 내가 숨을 쉬는 그 순간조차도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고요는 그 깊이를 더했고,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내 존재의 작은 흔적을 느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자연은 그저 숨 쉬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작은 목소리로도 아무 말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숨이 절로 깊어졌고, 나도 그 숨결 속에서 뭔가를 느꼈다.
그곳에서 나는 아주 오래된 감정을 되새겼다. 경외라는 단어, 그것이 바로 그 순간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였다. 자연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 앞에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 작은 몸짓 하나가 마음을 울렸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자연 앞에서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나약한지, 얼마나 미세한지. 그 미세함 속에서 느끼는 존재의 의미, 그 자체가 깊은 감동이었다.
내려오는 길, 작은 마을의 카페에 들러 따뜻한 핫초코 한 잔을 마셨다. 카페의 커다란 창 너머로 여전히 설산은 우뚝 서 있었고, 그 설산은 세상 모든 것들이 무색할 만큼 강렬했다. 그 아래에는 여전히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놀고, 할아버지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경이와 일상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이 풍경 속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무엇인가를 다시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비단 자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일상의 소중함,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나는 비로소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인터라켄. 나는 문득 이곳을 떠날 때, 어떤 마음이 들까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루체른을 떠날 때처럼 조용히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 떠나는 길에 대한 느낌은 달랐다. 루체른은 그저 나의 마음을 서서히 적셔주는 고요함이었고, 그 고요함을 마음에 품고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라켄은 달랐다. 이곳을 떠날 때, 나는 깊은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경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연이 내게 말을 걸어준 그 하루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내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자연은 때로 너무 크게 다가오며, 사람은 그 앞에서 더 작아지기를 원하게 된다. 우리가 그 앞에서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때, 그 모든 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인터라켄에서의 하루가 바로 그랬다. 경이로운 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그것이 내게 말을 건네는 순간, 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내 안에서 새로운 숨결을 찾았다. 이 숨결은 바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순간의 기억이었고, 그 기억은 내가 언제나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