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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예술로 번역되는 공간에서.... 파리

오르세의 빛, 몽마르트르의 질감, 마레의 속삭임, 철학자의 생제르맹데프레

by 콩코드


[파리 2]


4장. 오르세, 빛으로 그린 고독

5장. 몽마르트르 언덕 위, 예술의 숨결

6장. 마레 지구, 오래된 골목의 속삭임

7장. 생제르맹데프레, 철학자들의 거리에서

8장. 노트르담과 센강, 재 속에서 피어난 신의 건축

9장. 콩코르드 광장, 역사의 정적과 자유의 외침

10장. 샹젤리제, 화려함과 허상의 거리

11장. 에펠탑 아래, 황혼을 기다리는 사람들

12장. 로댕 미술관, 정원의 조각 같은 순간들




4장. 오르세, 빛으로 그린 고독


“한때의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물감처럼 캔버스에 스며들어, 언젠가 누군가의 눈에 다시 깨어난다.”


센강의 왼편, 루브르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 하나의 미술관이 있다.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겉보기엔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석조 건물, 하지만 그 안엔 빛으로 그려낸 수많은 영혼의 기억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오르세에 처음 발을 들이던 날, 나는 마치 오래된 편지의 봉투를 여는 기분이었다. 기차가 떠나던 역의 천장 아래, 이제는 붓과 색의 시간들이 정차해 있었다. 햇살은 천창을 통해 부드럽게 스며들고, 그것이 다시 화폭에 닿을 때, 그림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되었다.


나는 가장 먼저 모네를 찾아갔다. 그의 연못, 수련, 안개, 그리고 빛. 붓끝으로 수면을 어루만지듯 그려낸 풍경 속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그건 정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치 시간이 잠시 머문 자리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림을 본다는 건, 어느 순간은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라는 걸, 그날 나는 비로소 알았다.


고흐의 방 앞에 멈췄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짧고도 치열했던 삶, 광기와 외로움, 생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가 남긴 붓자국 하나하나가 너무도 선명해서, 마치 그의 호흡이 내 앞에 머문 듯했다. 푸른 하늘과 노란 들판, 그 강렬한 색의 대비는 말없이도 인간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 서 있었다.


드가의 무용수들 앞에서는, 나는 무대 뒤의 정적과 기다림을 보았다. 세상의 조명이 닿지 않는 그 틈에 깃든 고요한 슬픔,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오르세는 거대한 미술관이면서, 동시에 조용한 서재 같았다. 모두가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는 그 공간엔, 각자의 기억과 감정이 그림과 겹쳐지며 어딘가로 흐르는 기묘한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곳에서 나는 단 한 번도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걸. 그림 속의 누군가와, 혹은 그림을 마주한 어떤 이의 뒷모습과 어느새 마음의 거리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오르세를 나올 무렵, 센강 위로 햇빛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수면은 반짝였고, 공기는 조금 서늘해졌으며, 나는 오래전 그 역에 정차했던 어떤 이들의 숨결을, 아주 작게나마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숨결이 내 안 어딘가에 부드럽게 머물러 있다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림이 아닌 현실의 파리를, 그러나 그 역시, 하나의 살아 있는 풍경처럼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5장. 몽마르트르 언덕 위, 예술의 숨결


“한 도시의 영혼은 그 가장 높은 곳에서 조용히 바람을 맞는다.”


파리의 북쪽, 지하철을 타고 몇 번을 갈아탄 뒤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어느새 풍경이 열리고 언덕 위 하얀 성당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크레쾨르 대성당(Sacré-Cœur). 그 하얀 곡선은 마치 한숨처럼, 고요한 기도처럼 파리의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퍼져 있었다.


몽마르트르에 오르는 길은 늘 숨이 찼다. 좁은 골목과 경사진 계단, 거리마다 펼쳐진 작고 색색의 가게들. 기념품을 고르던 관광객들, 기타를 연주하던 거리의 음악가, 눈이 마주치면 가만히 웃어주던 초상화 화가의 붓 끝. 모든 장면이 느리고 따뜻해서, 그곳은 마치 시간이 물러앉은 공간 같았다.


사크레쾨르의 계단에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면 파리라는 이름이 더는 하나의 지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연과 고백, 사랑과 상처의 집합처럼 느껴진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아코디언 소리에, 나는 마치 오래전 한 편의 흑백 영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


언덕 너머,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으로 걸어가면 지금도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몇몇은 정물, 몇몇은 초상화, 그리고 몇몇은 자신만의 파리를 색으로 옮기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멈춰 그들의 붓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기엔 어떤 조급함도, 의무도 없었다. 다만 예술이란 것이,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의 일환이자 전부처럼 보였다.


한 작고 오래된 카페에 들어가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난 음악가의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창 너머, 화가들의 풍경과 언덕 아래 세상의 움직임을 동시에 바라보며, 나는 문득 몽마르트르가 단지 ‘예술가들의 언덕’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곳은 ‘그림을 그리는 공간’이 아니라 ‘삶이 예술로 번역되는 공간’이었다. 고단한 하루를 벗어놓는 사람들, 잊힌 꿈을 다시 꺼내 보는 여행자들, 사랑을 시작하거나, 혹은 마무리하는 이들. 그 모든 감정이 작은 골목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성당의 하얀 벽이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고 언덕 아래로 펼쳐진 도시에도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때, 몽마르트르는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숨을 내쉰다. 나는 마지막으로 언덕 가장자리에 서서 또 한 번, 파리를 내려다보았다. 이 도시의 중심에서 멀어진 그 자리에서 오히려 파리는 더 가까이,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


마치 오랜 연인이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6장. 마레 지구, 오래된 골목의 속삭임


“길이 기억을 품고 있을 때, 도시는 이야기로 살아난다.”


파리의 중심, 그러나 묘하게 중심 같지 않은 곳. 마레(Le Marais)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인 골목들과,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빛나는 석조 건물들. 현대와 고전, 일상과 비일상이 나란히 걷는 그 거리들 사이로 나는 천천히, 마치 오래된 소설 속 인물이 된 듯 걸었다.


마레 지구의 아침은 유난히 조용했다. 카페의 나무 의자들이 하나둘 정돈되고, 빵 굽는 냄새가 은근하게 퍼지며 거리는 눈을 뜨듯 숨을 쉬기 시작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조차 마치 지난 세기를 통과해 온 듯했다. 그 바람은 단지 머리카락을 스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스치는 감촉 같았다.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에 도착했을 땐, 잔잔한 놀라움이 가슴 안에 피어올랐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계획 광장. 직선과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붉은 벽돌 건물들 아래, 정원을 거닐던 사람들의 표정은 말이 없었다. 햇빛을 들이마시는 얼굴들,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조용히 산책을 즐기던 반려견들까지. 그 장면 하나하나가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번져 있었다.


나는 한 모퉁이에서 빅토르 위고의 집을 바라보았다. 《레미제라블》을 쓴 그가, 이곳에서 나날을 보냈다는 사실은 문득 이 거리의 공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그가 창밖으로 바라봤을 이 거리와 사람들. 그가 걸었을 이 골목의 굽이진 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서 겹겹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마레의 매력은 그곳에 흐르는 ‘느린 시간’에 있었다. 빠르게 소비되는 도시의 삶 속에서도 이곳만은 마치 시계의 속도를 조절해 놓은 듯했다. 세기를 거슬러 남은 건물들, 아트 갤러리와 독립 서점, 소규모 디자인 샵과 오래된 빵집이 나란히 존재하는 거리. 서로 전혀 다른 시간이 만나 한 도시를 이루는 풍경.


나는 조용한 골목 안 티숍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차의 온기를 손에 담았다. 그 순간, 파리는 단순히 '눈에 담기는 풍경'이 아니라 '천천히 체화되는 감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기다리며 머무는 것. 그 모든 것이 파리였다.


해가 지기 전, 나는 센 강변까지 걸어 내려갔다. 마레의 골목을 지나 강가에 이르면 도시는 다시 물과 함께 흐르기 시작한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지고 고풍스러운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는 시간. 그 길 위에서 나는 생각했다.


파리라는 도시는, 늘 거대한 건축물이나 유명한 박물관만으로 그 아름다움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마레 같은 조용한 거리, 익명의 창과 골목, 우연히 들른 책방에서 더 진하게 피어난다.


그리고 나는 그 밤, 그 골목 끝에서 속삭이듯 말하는 도시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곳은 당신이 조용히 걸어줄 때, 가장 진하게 말을 거는 도시랍니다.”



7장. 생제르맹 데 프레, 문학과 지성의 숨결


“생제르맹 데 프레는 단순히 거리가 아니다. 그곳은 시대를 초월한 지성의 향기, 그리고 문학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파리의 문학적 중심지, 생제르맹 데 프레. 이곳을 떠올리면 카페들의 모습과 고풍스러운 서점들, 그리고 도시의 지적인 분위기가 먼저 떠오른다. 시간을 초월한 이 거리에서 나는 마치 책 속의 인물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곳은 시인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작가들이 살아갔던 곳으로 유명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헤밍웨이, 그리고 폴 보듀앵이 사상적 논쟁을 벌였던 그 카페들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쉰다.


생제르맹 데 프레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들의 말과 글이 공기 중에 흩어져 그 자리를 빛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의 카페는 단순한 음료를 파는 장소가 아니라, 사유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사상적 교차점이었다. 커피잔에 담긴 음료처럼 그들의 사유는 하나하나 입안에서 녹아들었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파리의 지적인 풍경이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책처럼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고찰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생제르맹의 세계는 어느덧 나도 그 일부분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거리를 걸어가면, 문학적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풍스러운 서점에 들어가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고, 그 속에서 나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문학의 흐름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서점의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빈티지한 책들, 손때 묻은 페이지들은, 그 시대의 문학적 열정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지혜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 것처럼 책을 넘기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곤 했다. 이곳의 길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파리의 문학적 과거와 지적 탐구가 세월을 넘어서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생제르맹 데 프레는 단지 문학의 역사를 담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문학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길을 걷고, 책을 읽고, 고독 속에서 사유와 대화가 이루어지는 그 작은 순간들은,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자아낸다. 거리에서 나는 책을 넘기던 손끝처럼 시간의 흐름을 천천히 느꼈다.


생제르맹 데 프레에서는 말과 글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마치 한 권의 책처럼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문학을 통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의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 서점에서 만난 책들은 그 자체로 문학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생제르맹 데 프레의 이야기는, 오늘도 여전히 이곳의 카페와 서점, 그리고 길거리에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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