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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예술적 여정: 감각의 도시, 감동의 순간들

역사와 예술이 어우러지는 거리에서, 감성과 생각을 자극하는 공간들

by 콩코드



시테섬, 물과 시간의 교차점


센강 위를 흐르던 햇살이 조금씩 낮아질 즈음, 파리의 심장이라 불리는 시테섬에 발을 디뎠다. 도시의 기원이 이곳이라면, 시간의 가장 깊은 뿌리 또한 이 섬 한가운데 잠들어 있을 것이다. 지도 위로는 단순한 섬이지만, 내게 이곳은 시간의 모서리가 살짝 접힌 자리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많은 것들이 사라졌으며, 여전히 고요히 존재하는 곳.


걸음을 옮기자마자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물비린내에 가까운 센강 특유의 냄새와 오래된 석조 건물들 사이로 흐르는 바람이 교차하면서, 무언가 중첩된 감각이 느껴졌다. 이곳은 과거가 현재의 겉옷을 입고 살아가는 듯했다. 현대의 자동차가 달리는 다리와, 백 년 넘은 자물쇠가 채워진 철제 울타리가 나란히 있는 모습조차, 시간의 충돌이 아닌 공존처럼 보였다.


섬 한가운데 우뚝 선 노트르담 대성당은, 여전히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복원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그 모습마저 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경건했다. 유리창 없는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대성당 내부의 어둠을 천천히 감쌌고, 무너진 첨탑 자리 위로 새들이 맴돌았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라 믿기 어려운 이 건축물은, 불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믿음의 형상처럼 다가왔다.


노트르담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콩시에르주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웅장하진 않지만 무게감이 남다른 그 건물은, 화려한 왕실의 거처에서 혁명의 감옥으로 뒤바뀐 운명의 기로에 섰던 곳이다. 철창 너머로 들여다보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감방은, 이상하게도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이 오래된 시간의 벽에 달라붙어, 슬픔 대신 수용의 기운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그 길목에서 고개를 돌리면 생트샤펠이 있다. 겉은 수수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른 차원이 펼쳐진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신비한 빛이 성소를 가득 메우고, 그 빛이 마치 공간에 음악을 입히듯 잔잔히 흔들린다. 인간의 손이 도달한 아름다움의 극점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여기가 과연 교회인지, 꿈속 풍경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섬을 한 바퀴 도는 길에는 수많은 다리가 걸려 있다. 퐁네프는 가장 오래되었지만, 가장 넓고 튼튼한 모습으로 센강 위를 지탱한다. 다리 위엔 연인들의 웃음이 넘실거리고, 예술가들은 작은 화폭 위에 파리를 그린다. 이 다리 하나로, 시테섬은 다시 도시와 연결된다. 마치 마음 깊은 곳에 잠긴 기억이, 다시 삶으로 건너오는 다리가 되어주는 것처럼.


시테섬 위를 걷고 있으면, 내가 지금 과거에 있는 건지, 현재를 살아가는 중인지, 혹은 어느 몽환의 시간에 잠시 머무는 중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곳의 공기에는 과거의 숨결이 섞여 있고, 물결에는 현재의 빛이 반사되어 있다. 시간은 흐르지만 이곳에선 잠시 멈춘 듯 느껴진다. 파리라는 도시 전체가 그 섬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해가 기울면서, 섬 주위를 맴돌던 강물에도 붉은빛이 드리워졌다. 햇살은 대성당의 상처 난 첨탑 위에 마지막 불을 지피듯 반짝였고, 강 위로는 잔잔한 바람이 지나갔다. 고요한 물결 속에, 지금 막 이 도시에 도착한 이방인의 마음도, 오래전 사랑을 잃은 시인의 시선도, 모두 스며든 듯했다.


시테섬은 파리의 심장이라기보다는, 그 마음속에서 조용히 뛰는 박동에 가깝다. 떠나온 이들의 기억, 남은 이들의 체온, 그리고 지나간 시간의 속삭임이 고요히 얽혀 있는 자리. 내가 그곳을 걸었던 그 하루는, 마치 강물 위에 작은 감정 하나를 띄워 보낸 듯한 날이었다.




퐁피두센터, 도시를 담은 상자


파리에서 처음 퐁피두센터를 마주했을 때, 잠시 눈을 의심했다. 고전과 낭만의 도시라고만 알고 있던 파리 한복판에, 파이프와 배관, 철제 프레임이 그대로 드러난 낯선 상자 하나가 덜컥 놓여 있었으니. 그 기묘한 광경 앞에서 나는 어쩐지 긴장했고, 동시에 묘한 매혹에 사로잡혔다. 마치 도시가 스스로 틀을 깨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한, 파격의 예고편 같았다.


퐁피두센터는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자, 전통에 대한 반항이었다. 밖으로 노출된 배관과 덕트, 기계 구조물은 기능과 색상에 따라 각각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보통은 감추기 마련인 것들을 과감히 드러내면서, 이 건물은 말한다. 예술이란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라고. 그리고 모든 기능은 미학이 될 수 있다고.


광장에 앉아 그 낯선 건축을 한창 바라보고 있자니, 점차 그것이 도시와 유리된 구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도시 자체를 응축한 오브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복잡하지만 체계적인, 거칠지만 리듬 있는, 이질적이지만 어쩐지 파리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런 이상한 조화. 도시의 호흡과 인간의 상상이 공존하는 거대한 상자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그 낯섦은 더욱 깊어진다. 탁 트인 로비, 긴 에스컬레이터, 수많은 복도와 전시장들, 그리고 그 안을 채우는 수십 개의 현대미술 작품들. 익숙하지 않은 형상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미지들 사이를 걸으며, 나는 질문을 던졌다. ‘이것도 예술일까?’ 그러다 문득,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예술을 마주한 반응임을 깨닫게 된다.


퐁피두센터의 진짜 매력은 바로 그 ‘의문을 허락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미술관은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눈을 키우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고, 어떤 것은 웃음 짓게 하며, 또 어떤 것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나만의 해석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 복잡함 속에서, 예술이 인간의 감정과 인식의 확장을 돕는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한참을 걷다가, 마르셀 뒤샹의 ‘샘’ 앞에 멈췄다. 변기 하나를 그대로 전시장에 놓아둔 이 도발적인 작품은, 여전히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낯섦이야말로 퐁피두센터가 존재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경계를 흔들며,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


최상층의 전망대에 오르자 파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실루엣이 보였고, 에펠탑의 끝자락이 저 멀리 빛났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실험이 이 도시 위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퐁피두센터는 그 중심에서, 여전히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술관을 나와 광장에 다시 앉았을 때, 거리 공연을 하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재즈 연주와 춤, 말 없는 퍼포먼스가 사람들 사이로 흘렀고, 모두가 어색하지 않게 그 흐름 안에 녹아들었다. 퐁피두센터는 실내에서만 살아 숨 쉬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 바깥, 광장에서도,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예술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날의 퐁피두센터는 내게 단지 현대미술을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하고, 실험하고, 의심하고, 표현하는 것 - 곧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도시의 심장’ 같은 곳이었다. 예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자체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 하루.


파리 한복판, 노출된 배관과 구조물로 도시의 숨결을 끌어안은 이 상자는, 어쩌면 파리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가장 솔직한 얼굴일지도 모른다. 예술에 대해 정답을 묻지 않고, 그저 당신만의 시선을 허락하는 것. 그 자유가 이 도시를, 이 공간을, 이토록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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