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은 모름에서 시작된다.

고통을 설명하지 않고 곁에 머무르는 것의 윤리

by 심연온

“다들 나를 이해해준대요. 그런데,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녀는 분노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맞아요. 저도 사실 잘 몰라요.”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 듯 나를 보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사실은, 자기 자신조차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나는 널 이해해.
그 마음 알아.
다 그런 거야.


그러나 십수 년 동안 사람들의 고통을 마주하며 내가 배운 것은 이것이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말은 대부분 허위에 가까운 선언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해했다”라는 말은 타인의 세계를 내 언어와 내 경험의 틀로 순치시키는 행위일 때가 많다.





나는 네 고통을 안다.


그러니까 네 고통은 이 범주 안, 그러니까 이 병명으로 설명될 수 있다.

혹은 내가 아는 어떤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순간 타인은 타자성을 잃고, 내가 이해 가능한 존재로 축소된다.


어쩌면 상처는 몰라서가 아니라, 손쉽게 안다고 말할 때 생긴다.

그러니, 누군가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을 어렵게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관계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내면을 완전히 알 수 없다. 타인은 언제나 어느 지점에서 낯선 존재로 남는다.
그 낯섦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필연적 조건이다.


그러므로 존중이란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이 아니다.

존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다 알 수 없다.
당신의 고통을 완전히 재현할 수도 없다.
당신의 세계는 내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성급히 판단하지 않고, 그 모름의 여백을 여백인 채로 두겠다.


그 여백을 견디는 것. 그 불투명성을 억지로 투명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때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시작된다.





그러니 치유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어쩌면 병명이 아니라, 타인의 불가해성을 받아들이는 윤리에서 출발해야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순간은 이해가 완성되었을 때가 아니라,


"나는 아직도 당신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곁에 있겠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다.


존중은 아는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모름을 견디는 사람의 자세다.


그러한 존중의 태도에서
치유의 여정은 비로소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정신병에도 유행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