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의 시대와 우울의 그림자
요즘 각종 매체에서 소위 ‘심리 전문가’들이 가장 먼저 손절해야 할 사람으로 꼽는 존재가 있다.
바로,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다.
어떤 사람을 정신질환으로 규정하고, 소통보다는 단절해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는 방식이 과연 건강한 담론일까. 그 질문을 마음에 품은 채, 나는 오늘도 진료실에 앉아 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과연 우리 사회에는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장애 역시 개인의 생물학적·유전적·심리적 소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마치 떠도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처럼 특정한 성격 양식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신의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신질환에도 어쩌면 ‘유행’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프로이드는 전환장애, 혹은 히스테리아라 불리던 신체 마비 증상을 보이는 여성 환자들을 만나며 정신분석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마음속 깊이 억압된 욕망과 갈등이 불안을 만들고, 그 불안이 다시 신체 증상으로 전환된다고 설명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란 결국 억압된 것을 언어로 되돌리는 작업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프로이트가 살던 시대는 여성의 욕망이 사회적으로 철저히 억압되던 시기였다. 욕망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금기였고, 고통을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신체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역시 비슷하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70–80년대에는 히스테리아가 지금보다 훨씬 흔했다고 한다. 군 입대 후 걷지 못하게 된 군인, 시집온 뒤 말을 잃은 여성들.
그 시기는 억압과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였고, 약자에게 고통을 말할 언어는 허락되지 않았다. 고통은 신체를 통해서만 ‘합법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자기애성 인격장애로 돌아가 보자.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있다고 느낀다. 타인은 자신의 위대함을 비추는 거울이거나,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된다. 이들은 지위, 외모, 성취처럼 타인의 인정을 끌어낼 수 있는 것들에 집착한다. 그런 조건이 충족될 때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타인에게도 같은 인정을 요구한다.
능력과 성과로만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
SNS를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전시하고, 그 전시가 곧 자본으로 환산되는 환경.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기애적 특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쉽게 무가치감과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기애성 인격은 병리라기보다 후기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성격 양식에 가깝고,
우울증은 그 요구를 감당하지 못한 이들이 치르는 대가다. 어쩌면 자기애성 인격과 우울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니라, 같은 구조의 양극단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개인의 성격 결함이 아니라, 이 사회가 요구하는 생존 전략이 과도하게 내면화된 결과는 아닐까?
우리가 ‘괴물’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이 사회가 길러낸 가장 충실한 적응자일지도 모른다.
정신질환에 대한 투자는 늘어나는데, 우울증과 자살률은 왜 줄어들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개인의 마음만을 치료하려 하면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이 ‘바이러스’와도 같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AI의 출현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다.
인간이 따라잡지 못할 만큼 AI가 이루어내는 일의 속도가 빨라지는 시대에 생산성과 일이 지금처럼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게 될까?
그때 인간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또 어떤 형태의 고통과 정신병리가 유행하게 될까?
정신병에도 유행이 있다면,
그 유행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쩌면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