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고통에 진단명을 붙이는 사람들
“제가 망상과 환각이 있어요. 간헐적으로 공황발작도 있고요. 이렇게 힘든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그의 말은 사실 좀 이상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너무 정확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스스로 망상과 환각이 있다고 말하는 조현병 환자는 흔치 않다.
조현병은 감각과 지각, 인지의 왜곡으로 인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질환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경험을 ‘망상’이나 ‘환각’으로 규정하는 일은, 오랜 치료 과정을 거쳐 병식이 형성된 경우에나 가능하다.
그는 마치 정신의학 수업을 들은 의대생처럼, 익숙한 용어로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고통이라기보다 진단에 가까웠다.
나는 종합심리검사를 권했다. 결과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현병에서 흔히 보이는 와해된 사고나 지각의 왜곡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제 생각엔 환자분이 보이는 증상은 전형적인 조현병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왜죠? 제가 망상과 환각이 있다고, 너무 힘들다고 했잖아요.”
보통 조현병 환자들은 자신의 진단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왜 자신이 조현병이 아닌지를 따지듯 물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조현병 진단을 받고 몇년이 지나면 장애 진단이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저는 장애진단이 필요해요.”
그는 조현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문제도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세상과 타인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었고, 스스로를 독립적인 성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를 ‘꾀병 환자’로 치부하고 싶은 충동이 스쳤다. 동시에,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 최근에 만났던 다른 이들이 떠올랐다.
스스로 우울증인 것 같아 공부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수험생
업무 실수가 잦은 이유가 ADHD 때문이라고 확신하는 직장인
대인관계 갈등을 해리와 트라우마 증상으로 설명하는 휴학생
그들은 서로 다른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삶의 문제를 ‘정신질환’이라는 틀 안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들어 정신건강의학과를 둘러싼 풍경이 크게 달라졌음을 느낀다. 이전보다 훨씬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되었고, 동네 내과처럼 일상 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인터넷과 유튜브, 그리고 이제는 AI까지 등장하면서 정신의학과 심리학에 대한 정보는 넘쳐나고 있다.
그만큼 대중의 지식 수준도 높아졌다. 그러나 그 흐름 속에서, 또 다른 변화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고통과 갈등이 점점 더 ‘증상’으로 번역되고, ‘진단’으로 환원되고 있다.
정신의학을 처음 배우는 학생들이 혹시 자신도 수업에서 배운 질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듯,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언어 대신 진단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한다.
때로는 타인에게까지 그 언어를 적용한다. 갈등 속의 상대를 ‘나르시시스트’로 규정하고, 이해 대신 낙인과 배제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정신건강의학과의 역할은 어디까지여야 할까.
정신건강의학과는 여전히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곳일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고통이 병리로 번역되어서도 안 된다.
어쩌면 삶이란, 본질적으로 고통을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진단명을 필요로 했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더 이상 부연하지 않아도 되는 언어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진단명이라는 이름이 붙어야만 그 고통이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비로소 존중받을 수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고통은 정신질환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증상이나 진단으로 다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