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가 된 내 고양이, 콩이
‘아, 인생이 너무 길다.’
언젠가 나도 모르는 사이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말이다. 유독 인생이 너무 길고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지구나 인류, 혹은 이 나라의 미래까지 안 가도 당장 내일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잦다. 한 번도 기대한 적 없는 이상한 곳에 도착한 것 같은 막막함이 몰려오는 날. 아무래도 궤도를 크게 이탈해버린 것 같아 마음이 기우뚱한 날. 앞으로 남은 날이 노쇠와 질병과 외로움을 예비하고 있을 뿐, 좋은 날은 없으리라는 비관이 꼬리를 물고 방문을 두드리는 불면의 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아무래도 그런 고약한 생각에 더 잡아먹히기가 쉽다.
그럴 때는 복잡하게 파고들지 말고 재빨리 좋아하는 이런저런 것을 떠올리는 게 상책이다. 늪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붙들어 서둘러 균형을 잡는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 재빨리 기분을 전환할 방법을 아는 것은 혼자 사는 사람에게 특히나 중요하다.
내게도 충분히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움츠러들기만 하는 마음이 쫙 펴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나를 덥히고 키우고 위로하고 웃게 하는 것이 있음을 떠올린다. 잘 정돈된 침대, 갓 구워낸 빵의 냄새, 아삭거리는 채소, 오후에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 산들산들 산책하기 딱 좋게 불어오는 바람, 비의 예감을 품은 흙냄새, 누군가의 진심과 닿았던 것 같은 대화의 순간……. 때로는 손에 잡히는 사소한 것이 그 무엇보다 단단한 동아줄이 되어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이쯤에서 아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사람도 있지 싶은데, 맞다. 우리 집 고양이가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치유제다.
동거묘 콩이와 함께한 지 벌써 햇수로 8년째다. 원가족에게서 독립한 이후로 나와 한 공간에서 가장 오래 산 생명체가 바로 콩이다. 대학 시절 이모 집에 산 적도 있고, 선배나 친구와 산 적도 있고, 이후 배우자와 산 적도 있지만 모두 콩이와 함께한 시간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물론 첫 만남에는 이렇게나 오래 함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아니, 이 작고도 커다란 생명체를 집에 들여놓을 생각조차 못 했었다.
퇴근 후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귀가하던 길, 동네 초입에 있는 놀이터가 어쩐지 소란스럽다. 무슨 일일까. 호기심보다는 하루 끝자락의 고단함이 몰려와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사람들 틈바구니로 얼핏 고양이가 보인다. 촐랑촐랑 사람을 잘도 따르는 품새를 보니, 이거 좀 위험한데 싶다. 길냥이답지 않게 저리 경계심이 없어서야.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한마디씩 걱정을 보탠다.
“이렇게 사람을 잘 따르다가 꼬마 녀석들한테 해코지당할까 봐 걱정이네.”
“며칠이나 여기서 안 떠나는 걸 보니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 유기한 것 같은데.”
“오늘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얘가 괜찮으려나.”
고양이를 에워싸고 있던 이들은 알고 보니 동네 캣맘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양이에게 눈길을 주다가 문득 그네들에게 물었다. 집이 바로 요 앞이라고, 이불이라도 가져다주면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겠느냐고. 술을 한잔 걸친 탓에 평소와 달리 오지랖이 발동했다. 작은 이불 하나를 부리나케 가져다주니, 캣맘들이 구석진 곳에 보금자리를 착착 만들어줬고 다행히 고양이는 이불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데려가서 키우는 건 어때요? 아니면 임시보호라도…….”
캣맘들의 침투력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길냥이들을 돌보는 마음 약한 사람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히 공략의 타이밍을 아는 분들이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도리질을 한다. 귀여운 것과 별개로 생명체를 온전히 책임지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 작다. 나 하나 책임지기도 버거운데, 돌보고 키우는 것은 엄두가 안 난다. 내 깜냥을 넘어서는 일을 다시 하고 싶진 않다. 잠깐의 밀고 당김 끝에 혹시라도 고양이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때 임시보호를 하겠노라 말하고는 연락처를 남기고 헤어졌다. 아무쪼록 피치 못할 상황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런데 ‘혹시’는 비껴가는 법이 없다. 바로 그 주말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뿔싸. 올 것이 왔구나.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고양이와 관련된 일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놀이터에서 애들이 돌을 던지고 난리네. 얘 여기 계속 있다가는 큰일 나겠어요.”
이쯤 되면 물러설 곳이 없다.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어차피 임시보호니까, 임시보호만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빗장이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 단속을 한다.
놀이터에서 캣맘들과 접선을 하고, 집으로 안내를 하고, 그다음부터는 그야말로 일사천리. 이동장에 실려 고양이가 집에 들어오고, 밥그릇과 물그릇이 놓이고, 철망을 몇 개 연결해 만든 방묘창이 창가에 설치되고, 어라 하는 사이에 고양이 살림살이가 뚝딱 차려졌다. 화장실이 놓이고 모래까지 채워지니 원래부터 고양이가 살던 집이 아닌가 싶은 모양새다. 마치 내가 손님이고 고양이가 주인인 것처럼. 캣맘들은 타이밍의 귀재일 뿐만 아니라 도라에몽이었다.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은 뭐든 짠하고 꺼내놓는 도라에몽.
그러고도 한참 앉아서 당부를 한다. 자신들에 집에는 이미 서너 마리 이상의 고양이가 있어서 더 들이기는 어렵다, 임시보호 하는 동안 이러저러한 것을 주의해라, 마음 같아서는 데리고 있다가 키우면 좋겠다……까지. 어쩌면 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저리도 지극할까.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고양이를 위해 그들이 바치는 애정이 놀라웠다.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절로 커지기도 하는 걸까. 다소 긴 주의사항 끝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집을 나서니, 이제 고양이와 나만 멀뚱히 남았다. 작은 동물이라지만 둘만 있자니 아무래도 조금은 어색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집 안 곳곳을 탐색하던 고양이가 어느 순간 내 다리에 쓰윽 몸을 부빈다. 뜨뜻하고 말캉한 것이 다리를 스치는데,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얘는 대체 사람을 왜 이리 따르는 건가. 날 언제 봤다고 벌써 이렇게 온몸으로 마음을 표현하나. 분명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데, 어째서 버림을 받았나.
잠시 이곳저곳을 더 구경하던 고양이가 어느 틈엔가 침대 위에 올라가 잠이 들었다. 길에서 생활한 며칠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이 가는, 세상 곤한 잠이다. 방바닥에 깔아둔 방석은 성에 안 찬다는 듯,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선포라도 하듯 침대에서 팔다리 쭉 뻗고 잠든 모습을 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수준으로, 노숙자에게 침대를 빼앗긴 꼴이 되어버렸지만 잠든 고양이를 깨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꾀죄죄한 행색에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그 모습이 어쩐지 밉지가 않다. 어쩌면 그때부터 빗장은 이미 풀렸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고양이 발걸음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게 분명하다. 스며들어 저절로 번져간다. 집에 고양이 혼자 있는데 괜찮나 걱정이 되고, 어서 빨리 보고 싶어서 퇴근길을 재촉하는 내 모습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숨이 찰 정도로 집으로 뛰어가며 어떤 존재를 향한 마음이 이렇게나 실감 났던 적이 정말 오랜만이라 놀랐다. 불 꺼진 집에 나를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강아지세요? 귀가하면 반갑다고 머리를 들이대고 드러누워 배를 보이는 고양이라니). 내게 엉덩이를 딱 붙이고 잠을 청하는 존재가 있다. 이건 꽤 뭉클한 감각이다. 빗장은 스르륵을 넘어 활짝 풀리고야 말았다. 걱정은 여전했지만(이를테면 ‘유난히 이별을 오래 앓는 내가, 더 나이 든 내가, 나중에 상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같은. 시작도 전에 끝을 상상해버리는 것은 나의 좋지 않은 습관이다), 한번 같이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음을 정한 후 중성화 수술도 시키고(미안하다, 그렇지만 그래야 건강하게 오래 산대), 팔자에도 없는 동물 성명학을 공부하며 이름도 지어줬다. 거센소리가 들어가면 이름을 잘 알아듣는다고 했고, 먹을 것으로 지으면 장수한다고 했다. ‘콩’이라는 단순하고 흔한 이름이 그렇게 나왔다. 검정, 노랑, 흰색이 섞인 삼색이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사이 나는 삼색이는 99퍼센트가 암컷이고, 고양이는 하루 3분의 2 정도를 잠으로 보내며, 화장실 크기가 고양이의 복지에 매우 중요하고,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콩이는 내가 밥을 먹으면 자기도 따라서 밥을 먹고(가끔은 얄밉게 똥을 쌀 때도 있지만), 내가 잠자리에 들면 함께 잠을 자며 나와 생활의 리듬을 맞춰갔다.
나의 작은 그릇도 콩이 앞에서는 조금씩 넓어졌고, 예민한 성정도 콩이 앞에서는 나날이 뭉툭해졌다. 카펫에 토를 해도 신경질이 나기보다 괜찮다고 콩이를 달래는 게 먼저고, 실용과 미감보다는 콩이 위주로 가구를 고르고 배치했다. 새로 산 의자를 콩이에게 빼앗겨도 너도 좋은 걸 아는구나 껄껄 웃으며 기꺼이 양보하고, 뽀송뽀송 빨아서 말린 이불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먼저 차지해도 그게 또 그렇게 장하고 기특했다. 일하는 중간에 책상 위에 올라와 어서 토닥이라고 당당하게 애정을 요구하는 태도도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콩이에게는 도통 당해낼 재간이 없다. 늘 의심 많은 내게, 이렇게 의심 한 점 없는 사랑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내가 콩이를 거두고 돌본 게 아니라, 그동안 콩이도 나를 움직이고 재우고 키우고 돌봤다.
콩이의 기분 좋은 ‘골골송’과 애정 어린 ‘꾹꾹이’는 불안과 불면을 가볍게 가라앉힌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깜빡이는 그 순간에는 그 무엇보다 깊은 신뢰가 있다(고양이는 눈으로 키스를 한다). 어두운 생각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흐뭇한 미소만 남는다. 애정과 돌봄은 이렇게나 상호적이다. 심리치료사 메리 파이퍼는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에서 “고양이와 함께 잠드는 경험은 와인 세 잔에 해당하는 진정 효과가 있다”라고 썼다. 그리고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지만, 내 경험상 충분히 맞는 말인 것 같다”라고 유머러스하게 덧붙이는데, 나 역시 완전히 동감이다.
오늘도 까슬한 혀로 콩이가 얼굴을 핥으며 아침을 깨운다. 그러면 나는 어제 조금 망한 것 같아도 캣우먼이 되어 아침마다 부활한다. “콩이 잘 잤어?” “아유, 귀엽다” “간식 줄까?” 아침마다 좋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며 일어난다. 체온으로, 눈빛으로 오늘도 곁에 있는 나의 고양이. 이제는 반려가 된 나의 고양이. 첫째는 콩이에게, 둘째는 어벤저스 같았던 화곡동의 캣맘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덕분에 제게도 식구가 있네요. 혼자여도 혼자이지 않은 낮과 밤이 있네요. 덕분에 단잠을 잡니다. 그렁그렁한 날에도 넘치도록 찰랑이는 위로를 얻습니다. 함께인 덕분에, 인생이 길어서 다행이라고, 살아볼 만한 하루라고 생각하는 날이 늘어납니다.
☆연결 콘텐츠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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