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본소득에 관한 고찰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

by Jason Lee
캡처.JPG 언젠가는 지급될 수밖에 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대확산으로 재난지원금에 대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기본소득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재난에 앞서 이미 시대적 소명 과제로 떠오른지 오래다. 정체가 불분명한 정의인,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할 경우, 기본소득이 지급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이전까지의 여러 산업혁명을 통해서는 기술의 발전이 포용적 발전으로 확실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삶의 질이 높아지고 인류가 다양하면서도 발전된 기계를 통해 지금의 삶을 영위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의 재분배가 이뤄지지 않았다. 첫 산업혁명당시 기계파괴운동(Ruddite Movement)이 일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공장노동자들의 가치는 사라졌으며, 오히려 경영자들과 자본가들만이 보다 많은 금전을 손에 쥐면서 살아남게 됐다. 그리고 빈부 격차는 심해졌다.


언제일지는 모르나 맞이하게 될 인공지능시대가 도래한다면, 인류가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노동 인구가 줄어드니 부가 자본가 중심으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는 자본가가 부를 독점할 경우, 그 자본가도 끝내는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에 나서지 못하면, 결국 재화를 비롯한 나머지 활동, 즉 소비가 줄어들게 된다. 생산은 가속화되나 소비가 둔감되면 결국에는 금융이 생성될 수 없는 구조로 귀결된다. 결국 자본가는 엄청난 자산을 손에 넣게 되나 얼마나 많은 활동을 영위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코로나 대확산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나 혼자만 잘 산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부자와 빈자의 대처능력과 사교육 접근법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다지만, 이미 초연결로 인한 초경쟁사회가 도래한지 오래지만, 혼자서만 모든 것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자본이 있으면, 모든 것을 부리면서 살겠지만, 그 또한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알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하면, 모두가 머리를 맞대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가 그려갈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코로나가 가르쳐준 것 중 가장 확실한 것이다.


종합해 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처할 때 발생하는 소득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지급되면, 소비 활동이 진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물자의 이동으로 인한 금융업이 당연히 유지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일정 부분 노동력 이탈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다같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다는 점이다. 이미, 인류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확실한 사건을 통해 생산과잉과 소비부진이 야기하는 결과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기본소득을 무조건적인 대중영합주의라고 판단하면 보수보다는 수구, 혹은 역사를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알량한 소인배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는다.


꼭, 재난상황과 귀결시킬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제시되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코로나로 인해 보다 압축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라 봐야 한다. 이미 이전에도 스위스가 기본소득에 준하는 사회적 제도를 채택했으며, 아프리카 남쪽의 나미비아는 기본소득 실험대상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소득이 제시되는 기간 동안 학업성취율이 올라갔으며, 이는 자녀들의 교육수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소득이 중단되는 순간, 먹고 사는 것이 급급했기 때문에 등교는 커녕 생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기본소득이 특히 취약층이나 최빈국에 상당한 도움이 됨을 우리는 여러 사례와 연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앞서서도 언급했지만, 결국에는 금전을 얼마나, 어느 수준에서, 어떻게 마련하는지가 관건이다. 이번 재난을 토대로 추가경정예산을 무리하게 가용한 부분이 있지만, 추후 기술발전을 통해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가 인류가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노동분야를 대체한다면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소득분배에 나서고자 해야 한다. 그래야만 모두가 오래살 수 있다. 실제로 개발도상국을 보면, 잘 사는 이들은 잘 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생존조차 답보받기 어렵다. 이는 곧 그 나라의 포용력을 보여주며, 국가의 가치가 얼마나 낮은지, 또 발전가능성이 얼마나 저해될 수밖에 없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지표인 셈이다. 즉, 사회적 발전이라는 대전제로 다가서고자 한다면, 모두가 일정부분에 한해서는 형평성에 맞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잘 진행되긴 어렵다. 단순 자유무역(Free Trade)만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국가적 산업이라는 이유로 우위를 점해 다른 국가와 자유무역을 맺을 경우 피해가 보는 산업군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익을 과점하는 기업이나 조직은 사회적 재분배에 나서지 않았다. 이를 테면, 대한민국을 예로 들면, 자동차와 전화기는 많이 팔았으나 농업은 약해졌다. 그리고 종사자의 부의 비율을 보면 압도적인 격차가 나고 있다. 궁극적으로 국내 농업이 종말에 다다르고,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싸게 구매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니 국내적으로도, 최소한 자유무역을 통해 초과 이익이 발생했을 경우, 이익 공유에 나서는 것이 일정 부분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본격적으로 알린 이후 단 한 번도 공유는 커녕 보조금 지급조차 원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금을 낮추고, 기업의 수익을 장려했다. 그럼에도 현재 국내에는 시장주의자들이 여전히 많은 규제와 국가의 간섭이 횡행한다고 말하고 있다. 새겨들을 부분은 듣고 잘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유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IMF 사태가 보다 더 결정적이었다), 빈부 격차는 훨씬 더 증폭됐다. 즉, 기본소득이전에 소득의 전부도 아닌 일정 부분도 공유는 고사하고 지원조차 없었다. 이를 보면, 세계적으로는 예단하기 어려우나 한국에서는 아마 기술을 빙자한 자본 독과점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에 반하면 보수도 아닌 집단들이 보수인적하면서 좌파적 발상이라 언급할 것이다.


힘든 것은 당연하다. 이익을 공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 옛날 공산주의가 왜 망했으며, 대학에서 조별 과제가 시도 때도 없이 망하는 것만 보더라도 분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익 공유를 내세우는 상대적 사회적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니 지나친 이념 논쟁을 뒤로 하고 (반대로 이념론으로 제시하는 이가 있다면, 전형적인 색깔론자로 그동안 숱하게 기득권만을 대변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좀 더 멀리, 보다 다양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본문 중에도 언급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논의해야 할 사안들과 보다 직접적으로, 예상보다 이른 시각에 마주하게 됐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더 나아가 함께 잘 사는 방법인지 거듭 고민해야 한다. 정치는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 의견이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를 지나치게 사갈시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치열할수록 더더욱 골몰해야 한다. 이는 국내외적으로 모두가 마주해 있는 필수불가결한 사실이며, 특히 국내적으로는 IMF 사태, 금융위기, 자유무역 이후 시행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이익의 공유를 넘어서는 (18대 대통령이 공약으로 가장 먼저 내세웠던) 경제적 민주화가 비로소 발휘되어야 할 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코로나로 증폭된 미중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