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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go Dec 17. 2020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 사랑해요. 할머니를 기억하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전화는 잘 안하는 남동생이 왠일로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목소리가 평상시와 다름 없어 돌아가셨다는 단어 외엔 그냥 아무일 없는듯이 느껴졌다. 음... 돌아가셨다고?

언젠가 이런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손이 떨리고 목이 콱 막혔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막막했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초등학교 3-4학년때 까지 키워주셨다. 맞벌이 부모님이셨기 때문에 동생과 나는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그래서 일까? 나와 내동생은 김치도 잘 먹고 반찬투정은 커녕 입맛이 어른스러운 아이들로 건강하게 컸다. 이후에는 할머니의 고향, 할머니의 큰 딸 나에게는 큰 고모가 계시는 강원도로 가셔서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전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다.) 나머지 여생을 보내셨다.


내가 아는 할머니의 가족은 전무하다.

할머니의 부모님은 할머니가 6살이 될 때 모두 돌아가시고 안계셨다고 한다. 양자로 들인 오빠 한분만이 계셨는데 그 오빠를 많이 믿고 의지 하셨다고 들었다. 부모님 없이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할머니는 소학교를 다니셨다. 일제 강점기 하에 여학생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는 똑똑했다.

2-3년 다녔던 학력으로 글과 셈을 다 깨우치고, 일본어도 배웠다. (일제 강점기 하에 일본어는 배울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게, 내가 유치원 다닐 때 할머니가 하시는 일본어를 들었다. 외국어를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학생때 친한 친구 3명이 있었는데 지금의 우정타투 처럼 작은 점 3개를 문신처럼 팔에 새기셨었다는 얘기가 생각 난다. 그 중 한 분이 나중에 교장 선생님이 되셨다나? 우리 할머니는 작은 학교에서 교사 생활도 하셨다고 하는데 얼만큼 어디서 하셨는지 구체적인 내역은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강인하고 또 강인했다.

15살에 시집을 왔다. 살면서 7명의 자식을 낳으셨지만 어렵고 가난한 시절, 3명의 자식만 살아남고 나머지 아이들은 태어난지 얼마 안되서 모두 마음속에 묻었다. 아이를 잃은 슬픔도 잠시, 기울어진 가세를 세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다행히 목 좋은 사거리 코너에 집을 얻었는데 좋은 위치라 아빠가 어렸을 때 작은 구멍가게를 차리시고 생계를 유지하셨다. 그때부터 워낙에 셈이 빠르셔서 돌아가시는 그 날 까지 가계부를 적으셨는데 모두 암산으로 덧셈을 하셨다고 한다. 92세의 나이에. 우리 할머니도 진짜 대단 하시다. 그래서 치매도 없으셨고 정신적으로 늘 정정하셨다.(몸이 아프신 건 어쩔 수 없지만...)

할머니의 가계부. 2020년 11월 합계는 없다. 12월 2일 영면에 드시다. 이 가계부는 2012년부터 매 달 쓰여졌다.


할머니가 본인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셨던 나의 유년시절.

아빠의 직장이 있는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와 맞벌이 아들 며느리 내외가 일을하자 나와 내 동생을 돌보셨다. 늘 하시던 말씀이 있는데 부천에서 나와 내 동생을 돌보던 그 때가 본인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하셨었다. 주변에 알고 지내는 친절한 이웃들, 옆 동네에 사는 작은 딸 (나의 작은 고모) 가족들,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나의 외아들 (나의 아빠)을 보며 마음 한켠을 놓았으리라. 부천에 살았을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봄이 되면 작은 꽃을 따서 소꿉놀이 하고, 여름이 되면 동네 사람들과 집 옥상에 모기장을 치고 수박 먹으면서 놀았던 일(아예 옥상에 평상을 놓고 옆집 할머니네 애기들과 잠을 자기도 했다. 이름이 소연이었던가...소연이도 다 커서 시집갔겠지?ㅋㅋ), 골목 친구들과 놀이터에 가서 놀다가 할머니가 찾으러 오면 밥먹으러 집으로 뛰어 가던 일. 어렸을적 모든 장면에는 할머니가 계신다.  

할머니는 아이 둘을 건사하시면서 떡장사, 묵장사, 스티로폼에 꽃꽃이 하는 부업 등등 늘 바쁘게 사셨다. 하루 한시간이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처럼. 아들 내외가 돈을 벌었지만 본인도 도움이 되고 싶어 단 한순간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근검절약정신은 말해서 무엇해. 

돌아가신 뒤 할머니 아파트에는 정말 한번도 쓰지 않고 아껴 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다 쓰시지. 헌거, 안좋은것만 먼저 쓰고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이 많아 너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혼자 사실때에도 다리가 편치 않은 상황에서 폐지나 우유팩을 주어 휴지로 받으시는 아르바이트(?) 를 하셨다고 한다. 아빠나 고모들이 제발 하지 말라고 극구 화도 내고 말리셨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할머니가 더 생기를 잃으실까봐 말리지도 못하고 결국 설득당했다는 점. 이 외에도 초등학교 앞에서 교통신호 아르바이트 등 돈을 버실 수 있는 일은 다 하셨다.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 하는 일 이라고 한다. (롤랑 바르트/프랑스 철학자)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추억하는 글을 쓰며 늘 내 곁에 있는 할머니로 대상화 하려고 한다.


1929.05.06 - 2020.12.02 RIP 할머니 편히 쉬세요. 

이젠 자식들 걱정하지 마시고 할머니 행복하게 할아버지와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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