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사진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위태롭게 솟은 성당 앞에서 압도당할 때가 있다.
책으로만 보던 풍경을 실제로 마주할 수 있다는 설렘은
때때로 인파에 치이고 기대에 비해 흐릿해진 현실에 의해 실망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어느 작은 섬의 화이트비치를 떠올렸다.
산호초가 잘게 부서져 만들어진 해변.
발끝에서 시작된 하얀빛은 시선을 따라 어느 순간 에메랄드빛으로 번진다.
단조로워서 더욱 내 안을 가득 채웠던 곳.
그곳에 선 나를 떠올릴 때면,
나는 하얀 천에 묻은 작지만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은 존재가 된다.
그렇게 묻어 있어도 괜찮았던 시간.
오히려 묻어 있어서 더 기억나는 날들.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가게 된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풍경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묻히는 것이 아니라 녹아드는 방식으로.
당신은 나에게 화이트비치 같았어요.
여백의 느낌이 아니라 흰빛으로 가득해서,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어요.
그곳에 나는 어떤 얼룩을 남겼을까요.
당신에게 묻어버린 얼룩이 미안해지는 하루예요.
새해가 오네요.
시간은 다시 흘러가고,
우리는 또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겠죠.
그래도 당신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