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무해한 말

by 고양이

기간제와 정규직은 반대말이 아니다.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색할 정도로 업무적인 부분에서는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곳에도 그 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모두 알고 있는 선이 존재한다.


기간제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편견을 많이 들어왔지만 실제 내 주변에서 본 적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정규직이기 때문에 잘 보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관심이 없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겠다.


그는 매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핸드드립 커피를 내린다.
조금은 좋아서 하는 일 같기도 하고 때로는 숙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의 시작은 커피였고 끝은 언제나 싱크대 정리였다.


1년이 지났을 무렵, 그는 핸드드립 커피의 장인이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커피보단 차를 더 즐겨 마셨다.


어느 날, 내 책상 아래 휴지통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이런 것까지..'


물론 모두가 함께 쓰는 공간이고 옆자리까지 비우는 건 배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정리된 휴지통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내가 만든 쓰레기는 내가 버려야 하는 거 아닐까?’

그가 조용히 다녀간 자리는 늘 정리되어 있었고 그런 그의 태도에 나는 자주 미안해졌다.


불편하지 않게 "제 휴지통은 제가 버릴게요."라고 몇 차례 이야기했지만 조금만 방심하고 있으면

여전히 비워져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책상 밑 휴지통은 항상 비워져 있다. 쓰레기가 생기면 더 멀리에 있는 공용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게 되었다.


그는 금요일, 반차를 내고 일찍 퇴근했다.
다음 날 임용시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잘 보세요’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괜히 그 말마저 부담이 될까 걱정돼서.


얼마 전, 무심코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내년엔 정규직으로 다른 곳에 계시겠죠.”

그는 흠칫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응원의 뜻으로 건넨 말이었겠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잘되면 다행이고, 떨어지면 미안한 말’
그 말엔 어쩌면 선의보다 잔인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느낌이었다.
위로처럼 보였지만, 기대라는 이름의 짐과 그의 수고로움을 다 헤아리지 못한 말.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부족해서 나온 말.
선의에서 한 말이라고 모두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최선의 결과를 위해 고의적으로 악의를 내비치는 일 또한 얼마나 끔찍한가.


동기(과정)나 결과가 모두 좋거나, 좋지 않더라도 무해한 말은 없을까.

나는 여전히 그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물론 그에게는 무관심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이전글17. 제가 좀 고집이 없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