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다 눈바람을 뜨겁게 맛보았다.
2026. 2. 8. 일요일
흐릿한 아침, 커튼을 젖히자 온통 흰색이었다.
부서지는 파도도, 눈이 내린 해변도 흰색이었다.
바닷바람이 해변에 쌓인 눈을 가루로 쓸어 날리고 있었다.
그 눈가루와 함께 야자수 이파리도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보도엔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았다.
얼어서 사그락거리는 도로를 차 한 대가 느릿느릿 기어갈 뿐이었다.
해변에 쌓인 눈을 처음 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나는 감히 밖에 나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5층 숙소 창문이 이따금씩 쿵쿵 울렸다.
어제의 매운바람에도 끄떡없던 창문이었다.
덜컥 겁이 나 TV를 켜고
기상예보에 귀 기울이는 순간
'띠릭 뚝' 갑자기 불이 나가며 실내가 어두워졌다.
뭔 일이야, 창밖을 내다보니,
시야 모든 사방에 불빛이 사라졌다.
밤낮없이 불을 밝히던 함덕의 유명 카페 <델 0도>도 암흑이었다.
조천읍일대가 정전된 것이다.
세상에나, 제주바다 눈바람이 전기까지 끊었다.
바람의 위력에 놀라고,
금세 복구되리라 안심하던 마음도 잠시,
기다려도 불은 들어오지 않고 방안에 서서히 냉기마저 돌자, 나는 로비로 내려가 직원에게 물었다.
"언제쯤 불이 들어올까요?"
"지금 통화가 안 돼서 몰라요. 이렇게 눈 내린 게 처음이에요. 바람에 날려서 이만큼인 거지. 아니면 어마어마하게 쌓였을 거예요."
알겠다며 되돌아서는 순간 문득,
갑작스런 정전에 비상이 걸려
일요일 이른 아침 따뜻한 이불을 박차고 나와야 할 이의 고단할 마음이 떠올랐다.
우리는 실내에서 기다리면 되지만 그들은 눈바람을 고대로 맞으며 전봇대에 올라 수리를 할 것이다.
전기는 한 시간쯤 지나서야 들어왔다.
안도와 감사의 마음도 잠시,
오늘 비행기로 돌아가기로 했던 일행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폭설과 강풍에 공항이 마비되어 꼼짝없이 제주에 갇힐 판이 된 것이다. 부랴부랴 항공편을 다시 알아보았으나 낼모레까지 모두 매진.
내일 돌아가는 것으로 진즉 항공편을 예매해 두었던 나는 다행스러운 마음을 몰래 감춰야 했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리고 나의 염려를 뒤로한 채 공항으로 떠났다.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제안도, 얼어붙은 도로를 보더니 한사코 거부했다.
함덕바다에 다시 혼자 남게 된 나는
일행을 배웅하러 호텔을 나서자마자 강풍에 떠밀리던 내 몸을 상기했다.
아! 오늘도 하늘이 나의 뜨개질만을 허(許)하는구나.
나는 제주바다 눈바람에 완전히 꼬리를 내리며, 뜨개질에 열중하기로 했다.
두 개 남은 봄꽃 중 '루나리아'를 먼저 떴다.
루나리아는 은선초(銀扇草), 동전초라고 불리며 '유다의 동전', '교황의 동전'이라는 별칭이 붙은 꽃이다. 씨앗이 떨어지고 열매에 은빛 투명한 막이 남은 것을 본뜬 이름이며, 그것이 또 달빛처럼 빛나기에 '달과 같은' 뜻의 루나리아라는 이름이 되었다. 사진으로 열매를 찾아보니 드뷔시의 '월광'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몹시 서정적이다.
뜨개책에서는 분홍, 보라색인 꽃을 달의 느낌을 살려 노란 꽃으로 변형하여 도안을 제시했다.
루나리아를 다 떠갈 무렵,
정오부터 공항이 정상화되어,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잘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오늘 결항된 비행기로 공항은 북새통이었고
만 명이 제주를 떠나지 못했다는 보도를 보았었다.
일행은 운이 좋았다.
나는 식사를 위해 꽁꽁 싸매고 눈가루 날리는 매서운 바람 속을 잠시 걸었을 뿐,
밤이 깊을 때까지 내내 숙소에서 '주황철쭉'을 마지막으로 계획했던 뜨개질을 모두 마쳤다.
넷플릭스 <솔로지옥>을 틀어놓고 홀로 남은 공간의 정적을 깨면서 말이다.
눈바람에 갇혀
세상 달달한 연애프로그램을 보며 뜨개질하던 밤.
자연의 위엄 속에 고독하면서도 행복했던 제주의 마지막 밤이었다.
2026. 2. 9. 월요일
눈을 떠 창밖의 바다와 야자수잎을 보았다. 잔잔했다.
커피를 사들고 해변을 산책했다.
바람이 차갑지만 기분 좋게 서늘하다.
바다도 고운 옥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내려놓은 커피잔이 흔들리지 않는다.
어제의 눈바람이 꿈 인가 싶다.
봄을 고대하며 홀로 여행 온 나에게
첫날의 제주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황홀한 고백을 하였다.
그 고백을 가슴에 담자마자 제주바다는 돌변하여 사나운 눈바람으로 매정하게 나를 숙소에 가두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바다는
설레던 첫날의 매혹을 다시 보여주며 떠나야 할 나에게 또다시 오라고 감미롭게 웃는다.
이별을 선언하면서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이기적인 연인처럼
바다는 떠나는 이에게 자신의 가혹한 얼굴만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래, 잘 있어라. 제주바다야,
내 너를 보러 꼭 다시 돌아 오마!
I’ll be back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