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뜨개질하러 제주 갔다가...(2)

제주바다 눈바람을 뜨겁게 맛보았다.

by 버들아씨


2026. 2. 7. 토요일

'서우봉'을 오르기로 했던 계획은 공수표가 되었다.

어제보다 바람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그곳에 오르다가는

세찬 바람에 떠밀려 풍덩 추락해 버릴 것 같다.


나와 비슷한 마음들일까.

완만한 산책로조차 사람 한 명이 없다.


파도는 쉴 새 없이 밀려와 하얗게 부서졌다.

바람 가득한 함덕해변

해변 야자수의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흩날린다.

바람 속에 들어있는 차가운 모래알들이 뺨을 때리고 눈을 찔렀다.

숫제 칼바람에 모래폭풍이다.


영상 1도가 이렇게 추울 수도 있구나!


커피들고 나갔다가 한 모금도 못 마시고 발걸음을 돌렸다.

어제 밤늦게 도착해 깜깜한 바다만 봤던 일행이 제주바람의 실체를 마침내 확인한 양 단호하게 말한다.


'오늘은 드라이브만 하자'

별 수없으니 끄덕이지만, 차마저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제주에 올 때,

기상청예보가 틀릴 수도 있다는 한가닥 희망을 품었었다.

봄이 오는 바닷길을 머플러 날리며 걸을 수 있기를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택도 없는 일이 되고 있다.

이만저만 바람이 센게 아니어서

머플러가 아니라 내 몸뚱이가 날아갈 판이다.


이 기세의 바람과 추위라면

멀리서 오던 봄손님이 행차를 멈추고 되돌아 갈듯 싶다.

고개 빼꼼 준비하던 봄꽃들이 깜짝 놀라 땅속깊이 다시 숨어들 듯 싶다.

작년 이맘때쯤 뜬 봄꽃 모티브 1/2
왼쪽부터 유채꽃, 가는 잎 할미꽃, 양귀비/ 서귀포엔 벌써 피어있을 유채꽃이 이곳에 없는 이유를 알겠다.


우리는 아쉬운 대로 함덕주변을 차를 타고 둘러보다 해안길을 따라 김녕까지 가보기로 하였다.


도중에 동복해안에 들러 회국수를 먹기로 했지만,

차라리 내륙으로 들어가야 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불쑥 '사려니 숲'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추운 날에도 발길로 다져진 숲길이 미끄러웠다.

바다와 멀어지면 바람도 줄어드리라 생각했다.


숲이 품어주는 안온함만을 상상하며

어느 여름, 무성했던 사려니 숲의 뜨겁고 가쁜 숨결을 떠올렸다.


하지만 사려니 숲엔 거칠고 차가운 호흡만이 가득하다. 바람에 더해 눈까지 내리고 있다.

여우를 피해 왔더니 호랑이를 만난 셈이다.


눈바람이 몰아치는 주차장에서 내릴까 말까 망설이다, 스틱을 든 몇몇 사람들이 눈바람을 뚫고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용기 내어 그들을 따라가서는 십여분 만에

되돌아 나왔다.

'안 되겠다, 장비도 없이 가다 다치겠다.'

쫄보에 엄살쟁이가 되었다.


결국 다시 김녕으로 차를 돌렸다.


안에서만 봐도 해안도로는,

바닷바람의 위세에 갈대가 허리 굽혀 몸부림치고

부딪히는 파도에 하얀 포말이 눈처럼 흩뿌려지고 있다.


그 김녕 바닷길을 중년남자 3명이 묵묵히 바람을 견디며 걸어가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얼굴을 싸매지도 않았다.

김녕해변에 다다르자 바람을 맞아 얼굴이 빨개진 사람들이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한껏 차려입은 예쁜 옷이 추워 눈이 시렸다.


그들에겐, 송곳 같은 바람마저 참아낼 만큼 제주바다의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차속에서 경이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회국수만 먹고 미련 없이 함덕으로 돌아왔다.


몸을 감당할 수 없게 휘몰아치는 바닷바람이 무서운 나머지

오늘은 여행에서 계획한 것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서우봉도 오르지 못했고 김녕바닷길도 걷지 못했다.


숙소에 들어와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책 속에서 김영하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다.....'

나는 고작 이 한 문장에 위로를 받았다.


바람 덕분에 뜨개질할 시간만 넘치도록 많아지고 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투덜거리며

봄의 꽃 '루꼴라'를 뜨기 시작했다.

루꼴라 꽃, 픽사베이

루꼴라는 샐러드나 피자토핑으로 많이 쓰이는 잎채소.

잎을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줄기가 길게 올라오며 작은 꽃들을 피우는데,

연한 크림색 십자 모양의 4장 꽃잎에

갈색의 가는 줄무늬가 있다.


몇 년 전 주말농장에서 키웠던 루꼴라의 꽃도

흰색이었다

하지만 책에 나온 뜨개모티브는 갈색꽃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꽃사진을 찾아보았다.


아마도 뜨개도안을 만든 이는 갈색줄무늬의 특별함을 더 부각하기 위해 이렇게 갈색꽃으로만 표현했나 보다.


실제 루꼴라꽃은 수수하면서도 고귀해 보인다.

실로 뜬 뜨개모티브 또한 루꼴라꽃의 색다른 분위기가 있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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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하며 짬짬이 내다보는 함덕바다는 여전히 거친 숨을 내뱉으며 으르렁댄다.


TV에서 내일은 더 추울 것이라 말하는데

이 이상 어떻게 더 추울 수 있을까.


루꼴라를 뜨며 나는 중얼거렸다.


봄아, 빨리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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