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다 눈바람을 뜨겁게 맛보았다.
2026. 02. 04. 수요일
입춘답게 제법 푸근하였지만,
금요일부터 주말까지의 제주날씨는 강한 추위와 눈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어. 제주인데'
나는 두꺼운 롱패딩을 여행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뺐다.
내가 여러 번 경험한 제주의 겨울은 매섭지 않았었다. 견딜만한 추위였다.
고심해서 예매한 항공편과 숙소를 출발을 앞두고 취소하고 싶지 않다.
예정대로 내일 혼자 제주로 떠날 것이다.
뜨개질거리도 챙겼다.
작년 이맘때쯤 <초봄과 봄의 꽃 모티브>*를 밤낮으로 뜨다가
어깨가 뻐근해지고, 눈알은 빠질 것 같고, 코바늘 잡은 손가락에 통증까지 생겨 마지막 봄꽃모티브 4개를 남겨두고 그만 멈추었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까무룩 잊었다.
하지만 손의 기억이 놀라운 건지,
입춘의 바람결이 작년 이맘때를 떠올리게 했는지,
문득 생각나 뜨개질 상자를 뒤졌다.
이번 제주여행에서,
지나가는 겨울을 기억하고 다가오는 봄을 고대하며 남은 봄꽃 4개를 마저 다 뜨기로 한다.
읽을 책도 챙겼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하지만 가끔씩 그렇듯 기상청 예보가 틀린다면,
봄을 앞둔 2월의 바다올레를 걷느라 뜨개질도 하지 않고 책도 읽지 않을 것이다.
2026. 02.05. 목요일
처음 와본 함덕바다는 몹시 아름답고 황홀했다.
바다는 하늘색 한 방울 떨어뜨린 옥빛,
에메랄드에 흰색이 섞인 민트빛이었다.
'세모시 옥색치마'로 시작하는 가곡이 절로 떠올랐다.
그네를 타는 옥색치맛자락 같은 잔물결이 하얀 모래를 쓸어 올리고 쓸어갔다.
'아름다워, 너무 예쁜 색이야, 옥빛이 이런 것이로구나'를 속으로 계속 외쳤다.
미색의 모래사장은 저마다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 채 사진 포즈를 취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들 사이를 나는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옥빛바다를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는 이들의 모습이 예뻤다.
해변의 상점들 사이로 붉게 울며 사라져 가는 주홍빛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심장언저리 뭉친 우울과 그 어디껜가를 할퀴는 근심의 덩어리가 스러지는 해와 함께 가라앉는 것 같았다.
콕 치르는 찬기운도 바닷바람의 날카로움도 없는 다정한 제주였다.
2026. 02.06. 금요일
오늘 아침 함덕바다는 다른 얼굴이다.
바람이 매섭고 파도가 거칠다.
한파 기상예보가 맞아가고 있다.
가방에 넣었다가 빼낸 롱패딩이 아쉽다.
모자를 쓰고 머플러를 칭칭 동여매고 장갑을 끼고 단단히 준비하여 산책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산 커피의 홀더를 일부러 끼우지 않았다. 그래야 뜨거운 커피컵이 핫팩처럼 손을 데운다.
흐리고 바람 가득한 아침바다는 옥빛보다는 어두운 에메랄드빛에 가깝다.
해변의 모래까지 쓸어 날리는 세찬 바람을 피해 숙소에 들어와 창가로 의자를 옮겼다.
하얗게 물보라 치는 바다를 보며 뜨개질을 하기로 했다.
남아있는 4개의 봄꽃 중 라넌큘러스(Ranunculus asiaticus)를 먼저 뜬다.
빨강, 분홍, 노랑, 흰색, 주황 등 여러 가지 색으로 피어나는 이 꽃은
겹겹이 쌓인 꽃잎이 풍성하고 화려해 '봄의 여왕'으로 불린단다.
꽃말은 매력, 매혹과 함께 '비난하다'라는 의외의 뜻도 있다.
나는 참고하는 책**의 도안을 보고 노랑과 주황이 배색된 꽃을 완성했다.
뜨개질하는 중에도 창밖이 궁금해지면 밖으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였다.
얼마못가 언뺨을 손으로 비비며 숙소에 다시 들어와 뜨개질을 했다.
허리가 뻐근해지면 또 산책을 나갔다가 몸이 얼어 들어와 책도 읽고 브런치에 올릴 글도 썼다.
서슬 퍼런 바람이 휘몰아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난번 애월바다도 깜짝 놀랄 만큼 바람이 세고 시렸었다.
함덕해변에 있는 순하게 키 낮은 오름 '서우봉'은
오늘 밤늦게 도착하는 일행과 토요일인 내일 같이 오르면 되겠다 생각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흔하디 흔한 속담처럼
나는 제주 눈바람의 위용이 어떠한지 감도 못 잡는,
그저 풋내기 같은 한 마리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2편으로.....)
* 모티브는 특정한 패턴이나 디자인으로 만든 작은 뜨개질 조각을 말함. 각각의 모티브를 이어 블랭킷, 머플러, 가방, 테이블보등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다.
** 참고하는 책은 <사계절 꽃 모티브 200 손뜨개 도안집>이다. 이 책에 나오는 초봄과 봄의 꽃 도안을 보고 뜨개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