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션을 입다.

#28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 2017)

by john C

섹슈얼리즘과 미니멀리즘으로 구찌의 첫 번째 부흥기를 가져온 장본인이자, 자신의 하우스 브랜드 '톰 포드(Tom Ford)'를 이끌었던 디자이너 톰 포드는 10년 이상 몸 담았던 구찌를 떠난 후 영화감독으로 변신에 성공하며 세간의 이목을 또 한 번 집중시켰다. 첫 번째 작품이었던 <싱글맨(A Single Man, 2010)>으로 로튼토마토 85점 이상의 평가를 얻었으며, 주연 콜린 퍼스의 인생 연기로 아카데미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만든 영화라는 선입견을 깨는 역할을 했던 이 작품은 아쉽게도 현재 국내에선 어떠한 OTT나 VOD서비스에서도 볼 수가 없다.



2017년 개봉한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이자 가장 최근작인 <녹터널 애니멀스>는 전작 <싱글맨>과는 다른 분위기로 멜로와 스릴러 장르를 변주한 작품으로 베니스 영화제 시사위원 대상을 받는 등 수많은 영화제와 평단의 큰 호평을 받았으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원작은 오스틴 라이트의 <토니와 수잔>이라는 소설로 독일 프랑크프루트 도서전에서 원작을 제대로 반영하여 각색된 작품에 주는 상인 최우수 각색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4년 동료의 권유로 원작을 읽게 된 톰 포드는 바로 영화화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하얀 벽과 바닥, 검은 슈트의 두 남녀, 그리고 불쾌함만 남은 현대 예술의 허무함 단순한 색채의 조합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심는 톰 포드는 만의 디자인 언어이다.


성공한 갤러리 관장인 수잔(에이미 아담스 분)은 어느 날 전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 분)에게 미발간된 직접 쓴 그의 소설을 받게 된다. '녹터널 애니멀스(야행성 동물)'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가족과 여행을 떠난 한 남자가 밤의 고속도로에서 폭력적인 무리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절망과 복수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다. 수잔은 소설을 읽으며 과거 자신이 에드워드를 떠났던 기억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그 이야기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임을 느낀다. 결국 두 사람은 재회를 약속하지만, 약속의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에드워드를 기다리며 수잔은 남겨진 감정과 후회를 마주하게 된다.


욕망을 나타내는 빨간 벽과 하얀 옷과 오브제로 이루어진 주인공 수잔의 사무실


영화는 마치 한 편의 런웨이처럼 섹시하고 강렬하며 패셔너블하다. 진정한 사랑이나 참된 행복에 관한 이야기로 보이다가 갑자기 난데없는 불쾌감을 주는 스릴러 내지는 로드호러물로 변주한다. 과거의 수잔, 현재의 수잔 그리고 에드워드의 소설 속의 이야기가 매혹적으로 겹치며, 스토리상의 불쾌감과 영상의 미려함이 일으키는 불협화음 속에 나름대로의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비슷한 동작과 소리로 신을 넘어드는 점프컷은 3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는 점을 계속 일깨우며 극의 전체적인 몰입감을 더 한다.


영화 속 에드워드가 쓴 소설은 전처인 수잔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복수이다.


패션 디자이너보다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던 톰 포드는 디자이너로 쌓은 커리어를 유감없이 영화에 꾹꾹 눌러 담았다. 심플하지만 퇴폐미까지 느껴지는 미장센은 감각적인 광고영상이나 비디오 아트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구찌에서 보여주었던 미니멀한 의상들과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져 드라마 그 이상의 예술적인 가치를 높이기 충분했다.

멜란지 그레이 색상의 니트는 여리고 감정적인 인간의 속성을 나타낸다.


수잔 역으로 섬세한 내면 연기를 보여준 에이미 아담스는 톰 포드 다지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절제된 컬러감과 노출보다는 긴장감 있는 실루엣을 통한 관능미, 화려한 메이크업 등 구찌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미니멀한 섹슈얼리티가 그대로 묻어난다. 영화 내내 그녀는 거의 3~4가지의 컬러만을 이용한 의상을 입고 나온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권위를 내세운 올블랙의 드레스 착장으로, 집에서 홀로 책을 탐독할 때는 멜란지 그레이 컬러의 니트를 입는다. 블랙은 감정의 억제를 뜻하며 반대로 양감의 색이 베이스가 되는 멜란지 그레이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색상으로 수잔의 감정의 변화나 심리적인 흔들림을 표현한다. 집 안의 인테리어 역시 미니멀한 가운데 욕망을 나타내는 레드로 곳곳에 배치하여 수잔의 상승 욕구와 더불어 이기적인 성격을 대변한다.


생동감으로 대변되는 그린 컬러의 드레스를 입고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수잔


마지막 레스토랑에서의 만남을 위해 집을 나서는 수잔은 에메랄드그린 컬러의 이브닝드레스를 입는다. 무채색 계열만 입었던 그녀는 짙게 바른 립스틱마저 지운다. 이는 에드워드와 사랑을 나누었던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수잔의 마음과 에드워드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망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린 컬러는 시작이나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나타내는 컬러이다.


영화는 한없이 에드워드를 기다리며 레스토랑에서 홀로 몇 잔을 술을 들이켜는 수잔의 쓸쓸한 모습을 조망하면 끝이 난다. 영화는 세 가지의 시점을 통한 교차 편집으로 이루어지다가 에드워드의 예술 같은 복수로 끝이 난다.


'복수'라는 테마 때문인지, 독특한 미장센 때문인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종종 떠오르기도 했다. 두 감독 역시 복수라는 주제로 만든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과 헛 되고 허무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 인다. 두 감독은 예술이야말로 그 이기심과 욕망의 실재화라고 생각한다. 이기심과 욕망은 예술로 표현되고, 예술을 통해 그것들이 분출된다. 사랑과 우정, 배신과 배반에 따라오는 '복수'라는 테제는 욕심과 이기심의 정점에서 나온 산물이다. 주인공은 절치부심의 노력과 인내로 끝내 복수하지만, 결말이 시원하거나 성공적이지 않다. 예술과 복수는 그 허무함에서 서로 닿아 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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