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션을 입다.

#27 하우스 오브 구찌(House of Gucci, 2022)

by john C

이태리를 포함한 전 세계 패션 브랜드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담고 있는 역사를 가진 '구찌(Gucci)'의 창업자 '구찌오 구찌'는 영국 사보이 호텔에서 일하던 벨보이였다. 전형적인 상류층의 행태를 유심히 관찰한 그는 1921년 고국 이태리로 돌아와 피렌체에 작은 가죽공방을 열고 상류층을 위한 가방(주로 여행용 트렁크) 등의 소품을 만들어 판매하였다. 자연스레 당시 이태리의 상류 사회의 상징과도 같던 승마 도구를 제작하면서 승마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말에 물리는 재갈 디자인을 시그니처로 고수하게 되었다.

구찌의 상징과도 같은 "구찌 체인'은 말에 물리는 재갈(horsebit)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가죽의 수급이 어려워지자 가죽을 대체할 소재를 찾던 구찌는 일본의 대나무를 이용한 가방, '뱀부백(Bamboobag)'을 만들어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게 된다. 1953년 창업자의 사망으로 바통을 이어받은 장남 알도 구찌는 뉴욕에 매장을 내는 등 구찌의 글로벌 진출과 라이선스 사업으로 공격적인 경영으로 일관했지만, 동생 로돌포는 이태리 본사 중심의 경영으로 구찌만의 전통과 품질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경영방침을 유지하였다.


영화 에도 나온 대나무를 이용한 '뱀부백'은 1947년에 처음 출시된 이래로 현재도 계속 출시되고 잇는 스테디셀러이다.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는 이 시점, 구찌의 영화만큼이나 극적인 흥망성쇠를 그리고 있다. 극의 긴장감과 속도를 위해 많은 부분이 생략되거나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기에 내용보다는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력 그리고 복잡다단한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 줄 편집의 방향성이 영화의 주된 관람포인트다.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알 만한 구찌라는 거대 패션 브랜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패션과 미술 등 미장센에 많은 신경을 썼다지만 영화의 때깔보다 레이디 가가와 아담 드라이버, 알 파치노와 제레미 아이언스, 그리고 자레드 레토와 셀마 헤이엑이 보여주는 연기 앙상블은 정말 미친 수준이다.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의 포스터


파티장에서 우연히 만난 파트리치아(레이디 가가 분)와 마우리치오 구찌(아담 드라이버 분)는 이내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다. 구찌의 가족이 된 파트리치아는 남편을 꼬드겨 가족 내 권력 다툼과 경영권 싸움에 뛰어들게 하는 등 신분 상승의 욕망을 가감 없이 표출한다. 삼촌의 경영권마저 차지하게 된 마우리치오는 고향 친구와 바람을 피우며 파트리치아에겐 이혼할 것을 요구한다. 남편에게 실망한 파트리치아는 마우리치오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사랑은 결과론일까?


영화에선 레이디 가가가 연기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가 신분 상승의 욕망에 불타는 캐릭터로 그려졌지만 실제 파트리치아는 굉장히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구찌의 경영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으며 외부 활동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영화처럼 구찌의 몰락의 이유는 가족 간의 권력 다툼이나 배신보다는 과도한 라이선스 사업과 다각화와 경영 분산으로 인한 막대한 비용 지출 등 경영 능력의 부재로 인한 것이었다. 오히려 구찌의 가족 경영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인물은 영화 속에서는 비중이 크지 않은 알도 구찌의 아들 파올로 구찌였다. 신진 디자이너 '톰 포드'로 인해 극적으로 부활에 성공하긴 했지만, 실제 역사는 마우리치오가 구찌를 떠난 이후 '톰 포드'가 등장했다. 무려 15년간 군림한 톰 포드의 구찌는 1999년 LVMH와의 적대적 인수전에서 백기사로 등장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피노가 이끄는 거대기업 'PPP그룹(현 케링그룹)'에 인수되어 지금에 구찌가 되었다.


1994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이상 구찌의 수장이었던 톰 포드는 구찌를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하고 핫한 브랜드로 일구어놓았다. 은퇴 후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그런지(Grunge) 룩과 파워슈트로 양분되었던 남성 패션에 섹시함과 미니멀함을 추가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톰 포드의 디자인 철학은 구찌를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명품 브랜드로 탈바꿈시켜 주었다. 톰 포드의 구찌가 끝나고 잠깐의 숨 고르기가 있었던 구찌는 2015년 '알렉산드라 미켈레'를 만나면서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히 맥시멀리즘의 극한이라 할 수 있을 만한 디테일과 컬러링으로 빈티지와 모던함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통적인 명품 브랜드로써 고루한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시키며, 좀 더 젊고 힙한 느낌의 명품 브랜드로써의 구찌로 각인시켜 주었다. 미켈레의 구찌가 끝난 2023년 구찌는 발렌티노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사바토 데 사르노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데려옴으로 다시 한번 미니멀하고 정제된 디자인 언어를 가진 구찌로 회귀한다.


구찌의 두 번째 전성기로 이끈 알렉산드로 미켈리(중앙)와 그의 구찌 컬렉션


사르노의 시그니처인 진한 버건디 색상의 '앙코라 레드' 컬러 플레이로 '조용한 럭셔리' 열풍에 일조했던 구찌는 2026년, '베트멍'의 창립자이자, '발렌시이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있던 현재 가장 핫한 디자이너 중 한 명인 뎀나 바잘리아를 데려왔다. 이는 제대로 된 부활과 새로운 탄생을 꿈꾸는 구찌의 의지이자 전략으로 수많은 패션 피플을 기대를 모았던 만큼 구찌스럽지만 전혀 색다른 구찌를 선보였다. 전통과 현재의 구찌를 적절히 공존시켰다는 평이 다수인 가운데 그의 시그니처인 오버핏이나 해체주의에 가까운 아방가르드함이 없어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이번 컬렉션은 구찌를 다시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브랜드로 만들기 충분해 보인다.


복귀, 회귀를 뜻하는 '앙코라(ANCORA)'가 핵심 키워드로 작용한 사르노의 시그니처 '앙코라 레드' 컬러


영화 <한니발>부터 리들리 스콧과 장기적인 협업을 이어온 의상 디자이너 잔티 야츠는 영화 <글래디에이터>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했으며, 2025년 할리우드 뷰티 어워즈에서 공로상을 수상 하기도 했다. 실화 바탕의 영화답게 영화에 등장하는 극소수의 옷이나 액세서리는 빈티지 구찌 제품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제목에 '구찌'가 나온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구찌'의 협력을 받지 못한 채 영화가 제작되었기 때문에 일부분의 의상은 똑같지 않고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촬영하였다. 실제로 80년대의 구찌는 관능적이거나 섹시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영화의 극적인 상황 연출을 위해서라도 그 당시의 구찌 의상보다는 좀 더 트렌디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뎀나의 첫 구찌 컬렉션 '라 파밀리아'의 룩북 중에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이 영화는 패션 영화라기보다는 셰익스피어식의 비극에 가깝다. 욕망의 반대말은 무욕이나 불욕이 아니라, 만족이라고 한다. 욕망과 만족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양면성은 익히 알고 있지만 대면하기엔 한없이 낯설다. 패션도 그렇다. 우리는 패션을 보는 것보다는 입는 것에 관대하지만, 반대는 여전히 낯설다. 인간과 패션이 본질적으로 닿아 있는 부분이 그것일까 생각해 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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