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션을 입다.

#26 상의원, 2014

by john C

장항준 감독의 신작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인해 모처럼 한국 영화계에 훈풍이 불어오고 있다. 이미 600만 관객을 넘은 현재에도 계속 순항 중이며 아마도 개학 시즌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다. 만석인 상영관에서 한국 영화를 관람한 건 2023년 영화 <서울의 봄> 이후 처음이다.


<왕과 사는 남자> 중 한명회 역을 맡은 유지태 배우는 캐릭터가 가진 권력과, 권력에 대한 무한 야욕에 걸맞은 남색과 먹색 계열의 단령 관복을 입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창작자의 상상력을 덧붙인 이른바 팩션 드라마이다. 연출을 맡은 장항준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만들어진 이야기이기에 더욱더 배경이나 소품, 의상 등에 고증을 기했다고 한다. 특히 의상은 주조연을 막론하고 그 시대에 그 인물이 입었을 법한 500여 벌이 넘는 한복을 새로이 지었다고 한다. 이 같이 철저한 역사적 고증에 따른 연출 또한 지금의 흥행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비단 이 영화가 아닐지라도 한복의 고유한 특수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익히 알고는 있지만 현재에 들어서 오히려 양장과 양복에 비해 접근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흡사 영국의 비스포크 의상과 같은 구조감과 건축미 마저 돋보이는 한복은 이제는 평상시는 커녕 관혼상제 때에도 보기 힘들고 조선시대의 궁이나 종묘 등 관광지나 <왕과 사는 남자>와 같은 시대를 그린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느새 역사 속에 박제되어 버렸다. 나 역시 한복을 입어본 적이 수십 년이 지났고 구경해 본 지도 몇 년은 된 듯싶으니 세간의 관심에서 벗어난 지는 꽤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의 포스터(좌)와 이원석 감독(우)


<남자사용설명서, 2013>라는 다소 키치스런 B급 감성으로 컬트적인 영화를 연출한 이원석 감독의 2014년작 영화 <상의원> 역시 대한민국의 한복 특히 궁중의 복식을 소재로, 임금의 의대를 전속으로 짓는 어침장인 '조돌석'을 중심으로 한 극영화이다. 패션을 소재로 한 영화도 드물뿐더러 게다가 이제는 유물이 되어버린 한복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상영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은 놀라웠다. 아쉽게도 극장에서 상영할 때는 보지 못하였고 OTT 서비스를 이용해 감상하였다.


왕(유연석 분)과 왕비(박신혜 분), 어침장 조돌석과 천재 디자이너 이공진의 한복을 중심으로 권력과 질투, 야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조선 왕실의 의복을 관리하는 기관 상의원에서도 가장 최고의 장인인 어침장 조돌석(한석규 분)은 30년 동안 왕실의 의대를 손수제작해 오며, 궁중복식의 법도와 질서, 전통과 규울을 중시하는 장인이다. 어느 날 천재적인 지닌 자유로운 영혼의 디자이너 이공진(고수 분)이 궁에 들어오면서 둘의 갈등은 시작된다. 궁중 복식에 대한 예술과 전통, 장인 정신의 권위와 자유, 그리고 인간적인 질투와 권력이 서로 부딪히며,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진중하게 드라마를 풀어놓는다.


왕의 의대를 만지는 어침장 조돌석과 시정잡배이나 천재 디자이너 이공진이 같은 장인으로서 우애와 정, 질투와 시기를 양면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한복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보니 스토리보다는 미장센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다. 더불어 이원석 감독의 장난기 가득한 B급감성도 군데군데 숨어 있다.


공진은 기생의 옷이나 만들어주는 시정잡배였다.


반상제로 계급의 유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의 의복은 그 시대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특히 법도와 종사가 중요한 궁궐 내에선 품계에 따라 의복의 색상과 형식을 달리 하는 등 차별을 두었다. 왕을 비롯한 왕족의 옷은 신체의 본을 떠 항상 새로 지어 입었으며, 버선 하나도 세탁해 입는 일이 없었다. 반면 궐 내에서 근무하는 관인들의 관복은 흔히 말하듯 프리 사이즈로 키가 작은 사람이든 큰 사람이든 일정한 크기의 옷을 그냥 입을 수밖에 없었다.


왕의 눈에 들어 후궁에서 중전의 자리를 넘보는 소의 마마역의 이유비 배우 역시 고혹적인 궁중 한복의 자태를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유교 사상이 지배한 조선은 남녀의 차별도 심해 여성의 복장은 법으로 정해져 있을뿐더러 복요(요사스러운 복식)를 저지른 여자는 가차 없이 큰 벌을 받았다. 조선시대 양반집 규수의 의복은 기본 상하의 포함 기본 10벌이 넘는 옷을 겹쳐 입었다. 그에 비해 남성은 바지저고리에 배자나 마고자 정도 덧입었을 뿐 그리 복잡다단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이전, 삼국 시대 까지는 남녀의 의복에 유별이 없었다.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 봐도 의복의 남녀 구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옷의 컬러 또한 유교에 힘입어(?) 선택이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흔히 '백의민족'이라 불린 조선의 백성들은 깨끗하고 깔끔하기 때문에 흰 옷을 즐겨 입었던 것이 아니라, 하루가 멀다 하고 돌아오는 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를 지낼 때 입는 하얀 의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있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가끔 혼인 등의 이유로 컬러감이 있는 옷을 택할 때에도 왕이나 왕족이 사용하는 색상과 복식, 문양 등은 사용할 수 없었다.


혜원 신윤복의 <연소답청>에서 조선시대의 기생의 패션을 엿볼 수 있다. 양반이 말을 탄 기생을 보좌하는 모습이 참 이채롭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강한 압박 속에도 해제된 욕망이 분출되는 곳이 바로 기방, 즉 기생의 패션이었으며 조선시대의 기생은 가히 패셔니스타라고 불릴 정도로 새로운 유행의 상향전파 발원지이기도 했다. 특히 극 중 이공진이 선보인 상박하후(상의는 타이트하게, 하의는 풍성하게)의 스타일은 엄중한 조선시대의 규율 속에 여성의 아름다움과 성적인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낸 형식으로 실제로 조선 후기에 기생을 통해 유행되어 양반집 규수들도 즐겨하였다고 한다. 저고리의 타이트함은 점점 심화되어 나중엔 가위로 소매를 잘라내야 벗을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로 변화되기도 했으며, 치맛폭의 풍성함을 위해 서양의 페티코트와 같은 무지기치마와 대슘치마에 한지를 발라 형태를 고정하는 등의 형태로 진화하였다. 또한 저고리의 길이가 계속 짧아져 조선 후기에는 저고리만으로는 가슴이 가려지지 않는 흡사 지금의 언더붑 형태의 패션이 유행했었다. 이 역시 소매와 저고리단이 일직선이 될 정도로 짧아졌다고 하니 조선시대 여성들의 패션에 대한 열망과 욕심을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여성이 맨 살을 드려내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기에 현재의 브래지어 같은 별도의 가슴띠로 가려야만 했다. 이러한 여성들의 패션의 변화에 당시 사대부들의 원성과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눈을 뗄 수 없던 중전마마(박신혜 본)의 대례복 장면, 제작비만 수천만 원이 들었다는 후문이 있다.


이공진이 중전(박신혜 분)을 위해 만든 대례복(공식적인 궁중 연회 때 입는 복식)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우아하고 기품 있는 궁중 의상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전단후장형의 앞이 짧고 뒤가 긴 드레스는 마치 디즈니 공주풍의 크리놀린 드레스를 연상시킨다. 또한 극 중 스토리를 패션의 역사에 대입해 보면 1930년대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상박하후, 전단후장형의 드레스를 만든 스페인의 천재적인 디자이너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인판다' 드레스의 등장을 떠오르게 한다.


초창기 발렌시아가의 인판다 드레스는 적은 옷감으로도 풍성한 실루엣을 연출해 내어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지금까지도 발렌시아가의 역작으로 남아 있다.


<상의원>의 의상은 영화 <암살>, <도둑들>, <관상> 그리고 <신세계>의 의상을 담당했던 조상경 디자이너가 맡았으며, 이 영화로 2014년 대종상 의상상을 수상 하였다. 조상경 디자이너는 기존의 한복의 한계를 벗어난 이른바 '조선쿠튀르'식의 한복을 설계, 직접 수백 벌이 넘는 한복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특히 기존과 다른 모습의 한복을 연출하기 위해 염색법과 자수 역시 새로이 개발하여 적용하였다고 한다.


타고난 천재(모차르트)와 노력형 장인(살리에르)의 라이벌 구조는 많은 영화가 차용한 흔한 드라마트루기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천재와, 노력형 장인의 스토리는 당연히 영화 <아마데우스> 속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이야기로 대표되는 흔한 스토리이지만 한석규와 고수 두 배우의 출중한 내면 연기가 극의 깊이 더하여 새로운 구조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큰 틀 이외에는 역사적인 사실이나 고증이 크게 반영되지 않아 <왕과 사는 남자>와 같은 팩션 드라마보다는 퓨전 사극에 지나지 않는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의 한복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소중한 작품으로 개봉한 지 101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수많은 패션 관련 콘텐츠에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궁중 한복을 통해 장인과 천재의 예술적 갈등은 물론 권력과 야망, 정과 사랑을 보여준 영화 <상의원> 중에서.


한복을 입고 살아온 세대는 아니지만 한복이 주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어디지 모르게 마음의 고향으로 인도하는 기분이다. 또한 굉장히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의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한복이 암울한 시대를 거치면서 이미지가 규정되고 협소해진 것이 안타깝다. 문화의 전통의 계승은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정신과 철학의 정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영화와 더불어 우리의 전통인 한복이 가진 정신과 철학이 다시금 우리에게 새겨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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