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션을 입다.

#25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 2018)

by john C

사람들은 누구나 옷을 입지만, 누구나 패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인간이 태어났을 무렵부터 존재했었을 패션은 뼈를 깎는 인고의 고통 속에 여기까지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더욱더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을 예정이다. 특히 옷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디자이너나 테일러들에게는 조금 과장하자면 세상을 창조하는 것과 진배없는 크나큰 노력이 따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몸은 정형화되어있지 않다. 모델은 이상형에 지날 뿐,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디자이너에게 혹은 그 테일러에게 딱 알맞은 모델을 찾는 일은 아마도 옷을 짓는 일보다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허우적 되다가 결국은 말초신경계가 시키는 대로 이상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영화 <링컨>에서 링컨을 연기하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나의 왼발(My Left Foot: The Story of Christy Brown, 1989)>, <프라하의 봄(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1989),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york, 2003)> 등의 영화로 굵직한 메서드 연기를 보여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3번이나 수상한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은퇴작으로 알려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10번째 장편 상업영화 <팬텀스레드>는 1950년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서 1세대 뉴요커의 우두머리인 '빌더부처'를 연기하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당시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복구 과정에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완만한 성장세를 보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지출로 인해 긴축문화가 대두되던 시절이다. 때문에 패션도 화려함보다는 수수하고 다소 밋밋한 디자인의 옷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파리에서 시작된 이른바 '뉴룩'으로 명명된, 화려함과 여성성이 강조된 하이 쿠튀르와는 거리가 있었다. 소재나 색감에 자유롭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런던의 패션 하우스는 만듦새에 치중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새빌 로우는 비스포크의 성지로 불릴 만큼 영국의 테일러링은 가히 세계 최고였으며, 현재도 여전히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비스포크와 테일러링 등의 장인문화로 대변되는 1950년대의 영국의 패션


당시 파리는 물론 런던 역시 브랜드보다는 한 명의 장인에 의한 메종(하우스)이 패션계의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쇼핑몰이나 백화점 같은 개념은 희박했으며 옷을 구매할 여력이 되는 중산층이나 귀족들은 디자이너 하우스에서 개최하는 정기적인 의상 품평회에 참가하여 마음에 드는 의상을 구매하였다. 이러한 의상 품평회가 근대에 들어 패션쇼로 진화하였으나 현재는 쇼핑몰이나 백화점은 물론 인터넷상에서도 옷을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패션쇼의 목적은 조금 더 컬렉션이나 시즌의 무드를 상징하는 아방가르드함을 갖추게 되었다.


극 중 우드콕 하우스의 품평회가 열리는 가운데, 모델이 입고 있는 의상의 품번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


'전위적'으로 해석되는 '아방가르드'는 본디 프랑스의 군사용어로써 'avant(앞)'과 'garde(경비 또는 부대)'의 합성어로, 전방에 위치한 부대를 뜻하는 단어이다. 때문에 다소 실험적이거나 독창적이며 앞서 나가는 패션을 아방가르드 하다고 표현한다.


195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불어온 뉴룩의 대표 디올의 이미지


'뉴룩(New Look)'과 '시크(Chic)'로 불리는 프랑스의 디올과 발렌시아가가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좇는 실루엣의 극치를 보여주었다면, 영국은 '비스포크'와 '테일러링'으로 대표되는 장인문화가 있었다. 런던의 새빌 로우를 중심으로 펼쳐진 영국의 패션은 보여주는 것보다 내면의 구조감과 실용성에 무게를 두어 절제된 우아함을 강조하고 작거나 아주 작은 디테일로 각각의 장인들의 개성을 내세웠을 뿐 외형적인 천착은 오히려 피하는 분위기였다.


콜라.png 영호 <원배틀애프터어나더)의 포스터(좌)와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우)


최근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2025)>라는 작품으로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나오는 작품 모두 걸작 혹은 명작의 칭호를 받을 만한 대단한 감독이다. 러닝타임이 100분도 안 되는 소품이라 할 수 있는 <펀치 드렁크러브(Punch-Drunk Love, 2003)> 역시 여전히 적지 않은 마니아를 이끌고 있다. <팬텀 스레드>에서는 연출은 물론 촬영까지 맡아, 그 만의 인장이 가득한 미장센과 영상미를 느낄 수 있다.


<팬텀 스레드>는 패션이라는 무대 위에 벌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구조의 변화를 그린 영화이다.


1950년대 런던의 저명한 하우스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은 완벽주의적 성향과 엄격한 생활 규율로 자신의 하우스를 지배한다. 그는 시골 식당에서 만난 젊은 여성 알마( 비키 크리앱스 분)를 모델이자 연인으로 삼고, 그녀를 자신의 이상에 맞게 재단하려 한다. 그러나 알마는 점차 수동적 존재에서 벗어나 관계의 주도권을 흔들기 시작한다. 사랑과 통제, 의존과 권력이 뒤얽힌 두 사람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며, 완벽해 보이던 질서 속에 숨은 균열이 드러난다.


특유의 감성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응축된 이미지의 향연을 보여준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포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1950년대 런던의 시대상에 비춘 패션업계의 허울과 변화,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한 변태적인 욕망과 수직적인 이동,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예술가적 고뇌 등 단순한 서사에 몇 가지의 주제를 응축시켜 슬며시 꺼내 보여준다. 현악 중심으로 이루어진 클래식한 조니 그린우드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켜 더 큰 몰입감을 선사한다.


예술적 징인의 모습으로 어마어마한 메서드 연기를 보여주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의상과 패션 디자이너가 주인공인 영화이기에 많은 양의 의상들이 나오고, 의상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여과 없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타 패션이 소재가 되는 영화들에 비해 화려하거나 장식적이지 않다. 패션이 중심이지만 패션보다 그 안에 캐릭터가 더욱 돋보인다. 오히려 그 의상 속의 캐릭터가 더 궁금해지는 방식으로 패션을 미장센의 일부분처럼 이용하였다. 이는 이 영화의 코스튬 디자인을 맡은 마크 브리지스가 영화 속에서 의상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그는 이미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부기 나이츠 때부터 호흡을 맞춰온 사이이다. 그는 <팬텀 스레드>로 2017년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하였으며, 이 전 2011년 미셀 아자나비시우스의 영화 <디 아티스트(The Artist)>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처음으로 수상한 바 있다.


드레스를 만드는 과정 역시 조용한 우아함을 보여주는 미장센이 돋보인다.


주인공인 레이놀즈 우드콕은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의 전형을 보여준다. 수척한 몸에 광기 어린 눈빛,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루틴 가득한 생활 속에 은밀하며 변태적인 취향도 보인다. 가령 고객의 옷 라벨에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을 적은 글귀를 숨겨둔다던지, 자신의 옷의 솔기 안에 메모나 사진을 넣는다던지.

웨이트리스였던 알마에게 다가갈 때도 욕망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성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의 변태적인 성향은 양말에서 드러난다. 항상 무채색에 가까운 모노톤 컬러의 슈트를 입는 그가 유독 양말만은 빨간색으로 신고 있다. 이는 평소에 겉으론 보이지 않는 레이놀즈의 욕망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둘의 관계성에 대한 영화임은 암시하는 듯한 <팬텀 스레드>의 포스터


여주인공인 알마는 점점 자신의 몸이 돋보이는 쪽으로 의상의 선택이 변화한다. 처음에는 의상 자체가 캐릭터를 규정하고 의미 짓는 것처럼 옷의 실루엣이 사람의 몸을 커버했다면 점점 더 자신의 몸이 형태가 드러나는 의상을 선택함으로 사랑의 권력 구조나 각 남녀 간의 관계가 서서히 역전되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 후반 레이놀즈가 처음으로 만들어 준 버건디 컬러의 드레스를 능동적으로 다시 입고 등장하는 씬이 바로 구조의 역전이 최고치에 달함을 보여주는 연출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의상은 이 영화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구조체이자 구조를 이루는 ' Thred(실)'의 집합체이다.


아마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이러한 연인 간의 권력의 구조를 'Thread(실)'로 형상화하였고 실로 이루어진 옷을 영화의 소재로 삼으며 그 구조적인 형태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제목인 '팬텀 스레드'는 직역하면 '유령 실'이겠지만 '보이지 않는 실(관계)'로 의역할 수 있겠다.


주인공 레이놀즈 우드콕은 맡은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 영화를 위해 직접 옷을 만드는 일을 배워 수준급의 드레스를 만드는 수준까지 갔다고 하니 과연 메서드 연기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던 그가 돌연 이 영화를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를 발표했었다. 다행히 얼마 전 아들이 로넌 데이 루이스의 데뷔작을 위해 은퇴를 번복하고 7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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