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바비(Barbie, 2023)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패션에 관련된 일을 하는 꿈을 꿀 때가 있다. 패션계 내에서도 다양한 직종 중 아무래도 제일 선호되는 직업은 패션디자이너이거나 패션모델일 것이다. 모델이 될 수는 없으니 '내가 패션 디자이너가 된다면 같이 일해보고 싶은 모델은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많은 후보 중 단연 0순위는 영화 배우이자 제작자인 마고 로비였다.
호주 출신의 배우 마고 로비는 사실 패션모델을 할만한 배우는 아니다. 170cm도 안 되는 키에 빼빼 마른 몸매도 극단적인 S라인도 아니다. 영화에서도 얼굴이나 몸의 아름다움으로 연기하는 배우 역시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편의 영화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맡은 배역뿐 아니라 의상 역시 100% 소화해 내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런웨이의 모델들이 옷이 사람을 입은 것 같이 보이다면, 마고 로비의 이상 소화력은 진짜 사람이 옷을 그에 맞는 옷을 입은 듯한 현실적인 밸런스를 선사한다.
큼직큼직 화려한 이목구비, 키는 크지 않지만 길쭉길쭉한 팔다리 때문에 실루엣이 특히 아름다운 그녀는 영화배우로서도 완벽한 필모를 쌓고 잇는 중이다. 조금 무리해서 말하자면 할리우드의 A급 여배우들이 꺼리는 배역을 혼자 도맡아 하는 것 같다. 특히 영화 <바빌론>에서의 마고 로비는 바닥부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배우의 삶에 대한 심경 변화에 대한 내면 연기와 과장스러운 액션과 표정 연기도 전혀 어색함 없이 그녀만의 힘으로 영화 전체의 에너지를 이끌고 갔다고 본다. 감독인 데미안 셔젤 역시 영화 개봉 이후 인터뷰에서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는 마고로비뿐'이라고 말했다.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The Wolf of Wallstreet, 2014) >에서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 신인으로 부상한 마고 로비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The Suicide Squad, 2021)>, <바빌론(Babylon, 2023)>을 통해 출중한 미모와 폭발적인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로 성장하면서 자칫 이쁘장한 외모로만 소비될 수 있었던 자신을 끊임없는 내면화를 통해 성숙한 배우가 될 수 있었다. 출연하는 역할은 제각각이지만 마고 로비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항상 자신을 조롱하고 풍자하며 미리 자신이 소비되는 지점을 미리 알고 있는 상품과 같은 영리한 선택을 하게 된다.
할리우드에 대체불가한 배우가 된 마고 로비는 배우에 그치지 않고 배우이자 남편인 톰 애커리와 과 동료 PD과 협력해 '럭키챕 엔터테인먼트'라는 제작사를 설립, <아이 토냐(I, Toya, 2018)>,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 2020)>을 거쳐 영화 <바비>까지 여성 중심의 서사와 페미니즘적인 영화를 만든다.
영화 <바비>는 '바비랜드'의 살고 있는 주인공 '전형적인 바비'와 '켄'이 인형 같은(?) 삶 속에서 점점 균열을 느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리얼월드'에 찾아간다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띤 페미니즘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은 여자아이들이 아기인형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갑자기 거대한 '바비'의 모습이 나타나며, 아이들은 성인 인형인 바비를 보고 가지고 놀던 아기 인형을 깨부순다. 너무도 유명한 영화 스탠리 큐브릭의 역작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 a Space Odyssey, 1968)>의 오프닝을 오마주한 장면으로 배경음악으로는 예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흐른다.
1959년 처음 출시된 바비의 모습 그대로 블랙 앤 화이트의 모노키니 수영복 차림의 마고 로비의 등장을 시작으로 이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 인형과 사람의 경계를 허물며 시작한다.
이후 평화로운(?) 바비월드 속의 '전형적인 바비'는 이름처럼 너무나 전형적인 '바비코어' 패션을 선보인다. 핑크로 대변되는 바비의 의상과 소품은 많은 브랜드들이 참여했지만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가 바로 '샤넬'이다.
1910년 파리의 작은 모자가게로 시작한 샤넬은 남성복의 전유물이었던 저지나 트위드 같은 소재의 사용과 여유로운 실루엣의 여성복을 만듬으로 그 당시 불었던 페미니즘의 첫 번째 물결에 동참 또는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코르셋에서의 해방이 가져다준 여성패션의 진보는 여전히 패션계의 가장 큰 발자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통적으로 상복에만 쓰이는 검은색을 과감히 도입하고 디테일을 최소한하여 절제된 매력을 패션계에 가져온 것도 샤넬이 처음이다.
다이애니 왕세자비, 마릴린 몬로, 오드리 헵번부터 니콜 키드먼, 크리스천 스튜어트를 거쳐 지드래곤과 제니까지 100년이 훌쩍 넘는 동안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사랑한 샤넬은 글로벌한 명품으로 자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고 로비 역시 이 영화에서 샤넬과 함께 한 이유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페미니즘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인터뷰에서 밝혀듯 마고 로비는 어떻게 하면 더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 그녀의 고민과 열정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설명하거나 가르치려 함 없이 영화가 허용하는 과장의 최대치를 불러 모아 가장 현실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페미니즘을 설파한다.
영화 초반 바비월드의 이상 세계를 설명하는 몽타주 장면에서 등장한 샤넬의 시그니처 트위드 재킷은 '전형적인 바비'인 마고 로비는 물론 여러 바비들에게도 변주되어 입혀짐으로 여성성과 동시에 강력한 페미니즘적인 오브제로 활약한다. 이후 현실세계에서는 나오는 의상은 전부 무채색이거나 무광인 실용적인 평범한 의상들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반면 남자주인공인 켄(라이언 고슬링)의 의상은 100% 파상적인 껍데기로 표현하였다. 실제 일은 하지 않는 아니 못 하는 켄에게 '워크웨어'를 입힘으로 남성성의 상징만 가져다 사용했을 뿐이다. 퍼 코트나 웨스턴 복장의 마초적인 이미지를 차용하여 강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오프닝을 오마주한 것처럼 페미니즘의 탄생과 그간의 부침,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조롱에 가까운 자기 풍자와 연출을 통해 대서사시와 같은 느낌으로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동안 메시지를 꽉꽉 눌러 놓았다.
망가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 망가짐으로 자신이 타자에 의한 이용당함을 거꾸로 이용하는 모습이다. 피상적인 껍데기를 뒤집어 내면을 공개하는 방식의 연출로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과 거북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페미니즘을 와치면서 오버-페미니즘을 조롱하는 그녀의 방식이다. 이 점이 자칫 2시간짜리 바비 광고가 될 수 있는 영화를 전혀 광고처럼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오히려 그간 바비가 가지고 있던 거대담론을 재해석하고, 아이코닉함을 거세시킴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확립하였다.
주로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영성에 대한 영화를 연출해 온 그레타 거윅을 감독으로 선정한 것도 마고 로비의 선택이었다. 2009년부터 제작에 들어간 기획에 들어간 이 영화는 수많은 부침과 거듭된 실패의 과정 속에 꿋꿋한 영화 속 바비와 같은 마고 로비의 투철한 의지가 반영된 작품이다.
영리한 그녀가 차기작으로 에밀리 브론테의 1847년작 소설 <폭풍의 언덕>을 영화화한다. <폭풍의 언덕>은 이미 수차례 영화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기다려지는 까닭은 전적으로 마고 로비가 제작과 주연을 맡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영화화된 작품은 남자 주인공인 히스클리프(남성) 중심의 이야기 전개로 로맨스나 멜로의 서사를 그려왔다. 때문에 원작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과 비극에 대한 어두운 면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원작의 다층적인 이야기 구조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었다.
이번 <폭풍의 언덕> 역시 영화 <바비>의 의상을 담당했던 재클린 듀런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오스카 2회 수상에 빛나는 코스튬 디자이너 재클린 듀런은 이번 영화 역시 샤넬과의 협업으로 매혹적이고 파격적인 의상을 선보일 예정이다. 주인공 캐서린 역의 마고 로비는 50벌에 달하는 의상을 입고 나온다.
원작의 구조와 어두운 면을 극대화하고 여성 중심의 서사로 재해석된 마고 로비의 <폭풍의 언덕>은 또 어떠한 파장을 가져올 것인지, 또 어떠한 연기와 메시지로 삼장을 뛰게 만들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