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언니를 처음 마주하고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동안 불안해하는 언니를 매일 보러 갔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와는 매일 싸웠고 모진 말을 하며 얼마나 많은 절규를 했는지 모른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나의 부모는 역시나 실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최악이었고 실망스러웠다.
엄마는 여전히 [내 딸을 믿는다.]는 아주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모든 책임을 감추고 무지함 뒤에 숨어 자신을 방어했다. 그리고는 언니 계좌에 있는 생활비를 자신에게 이체해 달라고 했다. 영치금이 없어 입술에 바르는 연고도 못 사서 입술의 형체가 없이 다 터져있고 변호사 선임할 돈도 없어서 국선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는 절박한 딸의 상황을 보고도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정말 참담했다. 생활비는 알아서 하라고 절대 안 보낼 거라고 엄포를 놓으니 언니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못하니까 니가 기고만장하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괴한 말들을 뱉어댔다.
아빠는 몇 년 만에 통화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좀 도와달라고 울면서 애원해 봤다. 소주 한 병, 라면하나 덜먹고 영치금 좀 넣어달라고, 20년 동안 언니에게 미루며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가장 역할을 이번 한 번만이라도 좀 해달라고 빌었다. 알겠다고는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였다. 본인의 무능력함과 노쇠함을 한번 더 어필한 뒤 전화를 끊고 나서는 지금까지 단 1원의 영치금도 입금하지 않았으며 면회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사실 나는 영치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영치금은 내가 계속 지켜보며 부족하면 채워줄 수도 있고 내가 돈이 없으면 벌어서 보내면 된다. 이모도 안에서 기죽지 말라고 꾸준히 조금씩 도움을 줬다. 그리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자신이 만든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그냥 난 단지 부모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얼마나 우리를 생각하는지 그냥 그 마음 하나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원래 기대감도 더 이상 실망할 실망감도 없었지만 이젠 증오하고 경멸하게 됐다. 또 나 혼자 독하게 말하고 엄마한테 상처 주고 난리치고 발광한 흔적만 남았다. 엄마는 내가 너무하는 것 같단다.
매일매일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던 것 같다. 그냥 시시때때로 눈물이 났고 현실이 믿기지 않았고 부모의 태도는 살인충동이 생길 정도로 분노감이 일어났다. 창피해서 어디에 말도 못 하고 나 혼자 그냥 끙끙 앓아댔다.
나는 혼자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으로 무작정 도망쳤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죽겠다 싶어서 그냥 다 내팽개치고 갔다. 나는 고용분쟁 후 실업급여를 받는 상태였기 때문에 직장은 문제가 안 됐고 남자친구가 모든 비용을 대줬다. 남자친구가 없었다면 당시에 정말 내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모르겠다.
일본여행은 많은 도움이 됐다. 슬픔과 우울에 매몰되기 직전 숨 쉴 수 있도록 콧구멍만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상황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