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화를 추억하며

by 고신용


비디오 테이프 속에 갇힌 시간들이 있다.


검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면, 그 안에서 홍콩의 밤거리가 흐르고, 낡은 조명 아래로 누군가 담배를 물고 선다.


그런 장면을 처음 본 게 언제였을까.


아마도 TV에서 우연히 본 주윤발의 느와르 영화였을 것이다. 총을 든 채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골목을 걷던 그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멋있고 위태로웠다.


웃지도 않는데 어쩐지 마음이 흔들렸고, 그렇게 나는 홍콩이라는 도시에 감정을 빼앗겼다.


그땐 그랬다.


한 손엔 총을 들고, 다른 손엔 담배를 쥔 남자가 슬픔을 안고 뛰는 장면에서 어쩐지 사랑과 외로움을 읽었다.


지금 다시 보면 과장됐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엔 너무도 진지했고, 그래서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홍콩 영화는 현실보다는 감정이 먼저였고, 이야기보다는 분위기가 앞섰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어느 날, 중경삼림을 만났다.


무협도 아니고, 느와르도 아니고, 로맨스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 영화는 마치 나에게 꿈을 꾸는 것처럼 흐릿한 감정을 선물했다.


바삐 움직이는 도시 한복판에서, 어딘가 엇갈린 채 살아가는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 대사는 많지 않았지만,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는 시선과 침묵, 그리고 멈춘 시간이 있었다.


무엇보다 잊히지 않는 건, 음악이었다.


크랜베리스의 Dreams가 흐르던 그 장면. 금발 가발을 쓴 임청하가 편의점 안을 느릿하게 지나가고, 양조위는 그 움직임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다른 영화였다면 그냥 흘러가는 장면일 텐데, 중경삼림에서는 그 순간이 감정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노래가 나올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그 장면이 있었기에 그 노래가 제대로 들리게 되었을지도.


수없이 재생되던 캘리포니아 드리밍, 바나나를 사서 혼잣말하던 경찰 223호, 버려진 파인애플 통조림,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세상을 외면하는 표정.


이 모든 게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지 않아도 하나의 감정으로는 충분히 연결되었다. 설명은 없지만 느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은 모든 게 너무 선명하다. HD와 고해상도로 잡음 하나 없이 깔끔하게 편집된 영상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 시절의 홍콩 영화는 선명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번지듯한 조명, 거친 카메라, 배우들의 표정에 담긴 불확실함까지. 어쩌면 외로울 때면 꺼내볼 수 있기에 더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빠르고 효율적인 세상 속에서도, 가끔은 그 느릿한 감정이 그립다. 중경삼림의 금성무처럼, 냉장고 안에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나씩 넣으며 지나간 시간을 세어보는 그런 여유.


이제 그 시절의 홍콩은 어디에도 없다.


익숙했던 거리도, 서투른 표정도, 음악이 흐르던 공기마저도 모두 흐릿해졌다.


시간은 흘렀고, 그 모든 장면은 다시 오지 않을 순간으로 영영 멈춰 버렸다.


다신 닿을 수 없지만, 문득 문득 가슴 속을 스치는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추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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