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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Aug 25. 2024

미완의 순간을 견디는 것

Dear TS,

생각에도 변비가 있으려나. 엉겨있는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 어떤 글도 쓰지 못할 때가 있어. 그럴 때면 오롯이 나를 위해 글을 쓰려고 해. 하나씩 생각나는 대로 털어 놓다보면 아마 조금 실마리가 보이겠지. 


팻 매서니(Pat Metheny)의 Dream box를 들어. 가사 없는 재즈 기타 선율이 나른하게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것 같아. 긴장. 휴일 오후에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건 아직 끝내지 못한 글이 있어서야. 


사람들은 기자의 글이 밋밋하고 전형적이라고 생각할 거야. 나 또한 기자가 되기 전에는 똑같이 생각했어. 그런데 막상 기자가 된 후로 한편의 기사를 쓰는 일에도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특히 기업을 소개하거나 전문가를 소개하는 글은 일반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사실보다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짧은 글 속에도 반드시 매력적인 이야기가 녹아있어야 하지. 


작은 스타트업을 소개하는 글을 쓴 적이 있어. 마치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갈 준비를 도와주는 푸른 요정이 된 것만 같은 마음으로 글을 썼지. 젊은 대표가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스타트업 회사를 만들고 수익이 나지 않아서 고군분투하다가 조력자를 만나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더 큰 시장에 나갈 준비를 하는 스토리로 썼어. 진심으로 그들의 도전이 멋지다고 생각했어. 흔하지만 늘 먹히는 성공신화의 이야기였지. '잘 됐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들 때는 조금 더 애정을 쏟아 글을 쓰게 돼.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불리는 대학 교수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오랜 시간 학문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 산업계와 국가의 발전 방향을 묻고 답하는 이야기로 글을 썼어. 명확한 주제가 있었고 명확한 답이 있었어. 하나의 기사에 질문과 그에 대한 답, 그 답이 중요한 이유까지 풀어냈으니 완결성이 있는 글이라고 느꼈어. 


세상에는 참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 그들의 말을 듣고 글을 쓰는 나는 훨씬 부족하지. 가끔은 대학생들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 초등학생이라도 된 것 같아. 잘 모르는 것을 잘 아는 척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똑똑한 사람들을 만날 수록 상대적으로 위축돼 가는 내가 속상하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어. 세상이 이렇게 넓은 줄 모르고 말이야. 세상에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많고 앞서나가는 사람들이 많은데...그걸 모르고 살았어. 그래서 아직 잘 모르는 내가, 준비되지 않은 내가 기자의 이름을 붙여 기록이 남아버리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해. 


기자의 바이라인(By line)은 기사 끝에 붙는 기자의 이름이야. 영문으로는 Reported by ○○○라고 쓰는 것에서 비롯됐지. 책임과 능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한 줄이야. 늘 부족한 것 같은 글을 내놓을 때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압도될 때가 있지. 


브런치나 블로그는 가명으로 써왔는데 기사는 진짜 내 이름이야. 내 부모님을 포함한 대중들이 나의 이름과 존재를 알고 있어. 낱낱히 드러나는 기분이야. 가짜 이름 뒤에서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을 때와는 다르지. 훨씬 더 냉정하게 평가받고 훨씬 덜 공감받아. 


살면서 한번도 '이쯤 되면 완벽하게 준비했다'라고 느낀 적이 없어. 언제나 부족하고 미완성인 상태로 평가받았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것 같은 기분. 누군가 내 등을 자꾸 밀어내는 기분. 발가벗은 날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듯한 기분. 이 기분이 고스란히 기사를 쓸 때에도 느껴져. 일개 기자인 내가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겠느냐만, 나 자신의 평판과 경력을 살릴 수도 끝장을 낼 수도 있겠지. 그래서 매일 글을 쓸 때마다 점점 부담스러워.


결국 다시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거야.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점점 미루게 되어버리고 말아.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은 늘 잘 하고 싶다는 욕심에서 오는 것인데 그 욕심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 그래서 점점 더 시작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끝내는 것을 미루게 돼.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어떤 때는 팔다리를 툭툭 털고 흐름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완벽이라는 것은 상태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생각해. 완벽한 상태에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거야. 설령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 온다고 해도 영원할 수는 없겠지. 다만 더 나아지려고 애쓰면서 부끄럽고 불만족스러운 미완의 순간들을 견디는 것이 완벽주의자들의 숙명이겠지. 


지금 듣고 있는 Dream box앨범은 2023년, 그가 69세에 발표한 앨범이야. 팻 메서니의 삶의 궤적을 찾아 보고 있어. 어느 한 분야의 거장이 되기 위해 그는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까. 혹자는 그를 현존하는 가장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기타리스트라고 말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끊임없이 미지의 것을 탐구하고 변화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With Love

2024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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