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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과언니 Jun 23. 2022

너를 나의 반려충이라고 해야겠지?

여름이면 찾아오는 애증의 생물이라 해야 할지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 싶게 뜨거운 여름 어느 주말. 마냥 축 쳐지고픈 몸을 어렵사리 일으켜 미뤄뒀던 할 일을 하러 주방에 간다. 음식물쓰레기가 쌓인 묵직한 밀폐용기 뚜껑을 열고 시큼한 냄새가 코로 훅 들어오는 순간 숨을 참는다. 재빨리 봉지를 묶으려는데 반투명한 노랑 봉지 안쪽으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구더기다. 일반적인 반응이라면 질겁을 해야겠지만, 구더기의 전진은 왠지 계속 바라보게 된다. 이제 막 부화했는지 2-3mm가량의 여러 마리의 구더기들이 가늘고 작은 몸집을 이끌고 봉지 속 미지의 세계로 쭉쭉 뻗어나간다.      


학부 3학년 봄, 나는 구더기들의 보모였다. 유전학 실험 수업의 첫 미션은 모건의 초파리 실험을 재현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세대 초파리들을 잘 키워서 다음 세대와 그다음 세대까지 키워내야 하는데, 쉽게 말해 구더기를 계속 봐야 하는 것이다. 담당 조교는 실험조마다 돌아다니며 시험관에 초파리를 담아 나누어주었다. 이제 너희가 초파리의 보호자이니 책임지고 잘 길러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파리가 한눈에 세어지지 않을 만큼의 제법 여러 마리인 사실은 당황스러웠지만, 가만히 보고 있자니 몇몇 초파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빨간 눈으로 날갯짓을 힘차게 하는 것들 중에는 흰 눈을 가진 초파리도 있었고, 벽에 붙어 있거나 바닥에 있는 것들 중에는 날개가 굽거나 흔적만 남은 초파리들도 있었다. 


우선 시험관 속 초파리들을 여러 관에 남아 담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빨간 눈 초파리와 흰 눈 초파리, 정상 날개 초파리와 그렇지 못한 돌연변이 초파리, 눈 색과 날개 모양 모두 변이가 된 종들을 구분하여 담았다. 같이 지낼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으니 먹고 살 양식을 공급해줘야 했다. 먹이로 과일 껍질이나 상한 음식을 주면 되겠거려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초파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만드는 요리법은 꽤나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깨끗한 물, 이스트, 고소한 곡물가루, 한천, 식초 등 다양한 재료를 정확한 용량으로 시간과 농도를 확인하며 만들어야 했다. 정성을 다해 만들어야 실험 결과가 성공적일 것이라는 조교의 잔소리를 들으며 만들어낸 먹이는 며칠 지나지 않아 실험의 주요 변수가 되어 각 조를 괴롭히게 되었다. 


초파리의 생장주기는 짧다. 알에서 1령의 작은 애벌레까지 약 1일, 2령, 3령까지도 각 1일, 3령에서 번데기가 되기까지는 2~3일, 여기에서 성충을 보기까지 3~4일가량이 걸린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세대 성충이 번데기에서 나올 때, 시험관을 분리하여 다시 새 보금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첫 세대가 나오면서 관리해야 하는 시험관의 수가 배로 늘어났다. 할 일이 많아졌고, 손이 더욱 바빠졌다. 먹성 좋은 구더기들이 먹이를 다 먹어치우면, 배고프지 않도록 얼른 먹이를 만들어 시험관에 넣고, 식히고 굳히고, 구더기들을 옮겨주는 일을 반복했다. 먹이를 만드는 일은 정량의 재료를 정해진 시간 동안 불의 온도를 맞춰 쉼 없이 저어가며 만드는 일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먹이가 완벽해 보이지 않으면 다시 만들어야 했는데, 과정이 만만치 않다 보니 가끔 불량 먹이를 그냥 공급하다 초파리 가문 전체가 몰살되기도 하였다. 잘 만들어진 새 먹이가 들어있는 시험관으로 개체들을 옮기는 일도 초파리들이 안전하게, 한 마리도 빠짐없도록 진행되어야 했기에 쉽지 않았다. 에테르를 이용하여 성체 초파리들을 마취하여 정신을 잃은 동안 잽싸게 기록하고 옮겨야 한다. 이때 에테르를 과량 사용하게 되면,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초파리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실험조들이 생겨났다. 너무 묽은 먹이에 빠져 죽는 성체가 있는가 하면, 너무 건조한 먹이 때문에 구더기들이 갉아먹지 못하고 그냥 굶어 죽는 경우도 생겼으며 과량 마취로 깨어나지 못하기도 하였다. 우리 조 역시 피해 갈 수가 없었다. 시간을 아끼자며 요령을 부리기라도 하는 날엔 어김없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개체들이 생겨났다. 


미물이라 여겼던, 하찮아 보였던 초파리였으나 생명이 있는 생물을 기르는 일에는 이렇게나 정성과 노력, 시간이 필요했다. 실험을 시작한 지 불과 2-3주 만에 유전학 실험 수강생들의 스케줄에서 초파리 먹이 만들기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고 초파리 구더기는 세상 소중한 내 새끼들이 되었다. 두 번째 세대가 부화하면서 실험실 풍경은 꽤 흥미롭게 변해가고 있었다. 

각 조마다 들려오는 말을 듣고 있자면, “맘마 먹자 얘들아.” “오구오구, 잘 먹네”라는 둥, “먹이 줄 때, 이렇게 허밍 해 봐. 얘네가 좋아하는 것 같아”라는 둥 아주 가관이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징그럽다, 더럽다 하며 실험 주제에 혐오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작디작은 초파리 한 마리, 구더기 한 마리에 애정을 담고 있었다. 초파리의 세대가 거듭되면서 실험을 통해 길러낸 초파리는 야생형과 돌연변이 모두를 포함하여 수천 마리가 되었다. 실험을 마무리하며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을 하면서 저마다 초파리 에피소드를 간증하느라 시끌벅적했다. 우리들의 실험은 모건의 실험 결과와 유사한 결괏값을 얻었고, 성 연관 유전형질 등 책에서 보았던 내용을 실제로 확인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혐오했던 대상을 가까이하고 알아가는 동안 하나의 생명체로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던 경험은 굉장히 특별했다. 


어느 여름날,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묶으며 생각한다. 내가 코를 막는 이 냄새는 내가 버린 음식물쓰레기를 받아서 열일하는 구더기의 땀냄새일 거라고. 쓰레기가 아닌 자연으로 돌려보내고자 애쓰는 구더기에 잠시 경의를 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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