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렌즈, 통하는 배려
어릴 적부터 눈이 나빴던 나는 안경점에 가는 일이 잦았다. 안경점에 가면 시력을 재고 까만 테 안경을 씌워준 뒤, 그 안에 안경 렌즈를 이리저리 끼웠다 뺐다가 다시 끼웠다가 하신다. 그것에 따라 나는 보였다가 잘 안 보였다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였다. 간혹 렌즈 위에 렌즈를 덧대기도 하셨다. "잘 보이니? 안 보이니?" 그 물음에 답하며 나는 나에게 맞는 선명함을 찾아가곤 했다.
조금 더 머리가 굵어진 뒤에야 알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에도 이렇게 저마다 다른 도수의 렌즈가 끼워져 있다는 것을. 보이는 건 보이고 안 보이는 건 안 보이고. 더 나이가 먹을 무렵에는, 내 기준에서 ‘어떻게 그게 안 보이지?’ 했던 일들이 ‘정말 못 보는 것이구나’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상대한테 화가 훨씬 덜 났다. 저 사람은 안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가 가진 렌즈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배려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베푼 배려가 그 배려를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상대는 모르는 배려.
그때부터 고민스러워졌다. 상대도 모르는 배려라면 그렇게까지 내가 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이내 내 선택은 ‘기꺼이(Go)’였다. 상대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는 알지 않는가. 그래 그냥 나는 그리 살자고 마음먹었더랬다.
그 결심 끝에 다시 스스로를 검열해 보았다. 혹여 내가 모르는 상대의 배려도 있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는 내가 받은 배려. 가만히 눈을 감고 많지 않은 나의 지인들의 이름을 하나둘 떠올려 본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을 더듬으며, 내가 놓쳤을지도 모를 그들의 다정한 렌즈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닦아본다.
어쩌면 나의 가치관이 변해온 과정도 이 렌즈를 바꿔 끼는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어렸을 적 나의 가치관이라 하면 ‘진심은 통한다.’였는데, 30대 이후 뒤에 문장이 하나 붙었다. ‘밑 빠진 독은 소용없다.’라는 문장이다. 그리고 40대 이후에는 문장이 하나 더 늘었다. ‘깨진 독은 오래 걸린다’. 내 딴에 진심을 쏟아붓는 것만큼이나, 그 진심을 담아낼 상대의 독이 어떤 상태인지 살피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나는 너무 오랫동안 부모님의 엇갈린 렌즈를 지켜봐야 했다. 평생을 함께 산 부모님이었지만, 두 분의 진심은 좀처럼 서로에게 닿지 못했다. 한 예로 아빠는 나름의 배려로 부지런히 음식물 쓰레기를 비워주곤 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그 행동을 반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일을 도와주길, 본인의 마음을 먼저 살펴주길 원했다. 아빠의 배려는 번번이 과녁을 비껴갔다.
엄마의 배려 역시 아빠에겐 닿지 않는 외침이었다. 아빠가 밖에서 조금 더 반듯해 보이길 바랐던 엄마는 정성껏 옷을 골라주었지만, 평생 옷차림에 무뎠던 아빠에게 그것은 다정한 배려가 아닌 귀찮은 간섭일 뿐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챙겨준 옷들을 거추장스러워하며 밀어냈다. 각자의 렌즈 속에서는 분명 빛나고 있었을 진심들이, 상대의 렌즈에는 한 번도 선명하게 맺히지 못한 채 평행선만 그리다 닳아갔다.
나는 그 차가운 평행선 끝에 남은 마음들을 보고 자란 아이였다. 부모님의 오랜 다툼을 지켜보며 자랐기에, 나는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내 아이에게는 결코 주고 싶지 않았다.
이 깨달음은 결혼 생활이라는 거친 파도 속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결혼 후 남편과 참 많이도 다퉜다. 우리는 사고방식부터 매우 달랐다. 사회적인 가면이라는 MBTI조차 같은 글자가 하나도 없을 만큼, 서로의 세계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를 이해하기로 '선택'했다.
먼저 핸드폰에 저장된 ‘남편’이라는 단어를 ‘동반자’로 고쳐 적었다. 그 옛날 엄마들이 물 떠놓고 빌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속 지성을, 이름 세 글자 고치는 것으로 쉽고 빠르게 대신했다. 그리고 이해하려면 알아야 했기에 조용조용 그를 캐 내려갔다. 어려서 어떤 환경이었는지, 나와는 무엇이 다른지. 그러자 비로소 그가 이해되는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_이름 세 글자를 고치는 이 작은 행동은, 사실 내 뇌 속에 단단하게 굳어져 있던 방어벽을 허물고 그를 '경계해야 할 타인'이 아니라 '연대해야 할 내 편'으로 다시 연결(Rewiring)하는 치열한 시냅스 공사의 시작이었다.
상대의 독이 깨져 있다면, 그것은 그가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형성된 '내적 작동 모델(Internal Working Model)'이 손상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사실을 알면 억울함 대신 연민을 가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상대에게 보이는 렌즈’로 배려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생각하는 배려가 아니라, 그가 정말 원하는 배려를 해주었을 때 그것은 다툼을 완화할 완충재가 되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배려란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해서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영역의 것들을 말한다. 내가 하기 싫은 데 억지로 참아가며 하는 배려는 결국 나를 갉아먹는 희생이 될 뿐임을 알기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기분 좋게 건네는 성의를 택했다.
그리고 "나는 싸우고 나면 이런 게 필요해. 당신은?"
나 또한 내가 원하는 렌즈의 도수를 그에게 명확히 알려주었다. 원래 나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쓰디쓴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고된 육아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나를 버티게 해주는 건 쌉싸름한 원두 향이 아니라 혈관을 타고 흐르는 달달한 믹스커피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툰 뒤에 남편이 말없이 사다 넣어주는 ‘냉장고 속 커피’가 나에겐 큰 완충재가 될 것이라 일러주었다.
내 필요를 명확히 말하는 것은 구걸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내 뇌의 '사용 설명서'를 건네는 일이다.
하지만 이 렌즈라는 게 참 묘하다. 한 번 잘 맞춰두면 평생 선명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 어느샌가 손지문이 묻고 뿌연 안개가 낀다.
냉장고 속 커피의 변화처럼.
처음에는 초록색 로고가 선명한 프리미엄 커피가 위풍당당하게 냉장고 첫 번째 칸을 차지하더니, 시간이 흐르자 슬금슬금 이름 모를 브랜드로 바뀌어갔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너무나 친숙해서 이제는 가족 같은 느낌마저 드는 '레쓰비' 캔 하나가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식이다.
그럴 때면 나는 서운해하기보다는 다시금 안경닦이 천을 찾아야 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시 먼지 낀 렌즈를 닦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못 이기는 척 다시금 나의 도수를 확인하곤 한다. 이렇듯 서로의 도수에 맞는 배려를 해주면 이 배려들은 겹겹이 쌓여 갈등이 생길 때 그 갈등을 완화할 기억의 완충재가 되어준다. 특히 갈등의 크기가 서로 비등비등할 때, 서로를 깡그리 무너뜨리지 않게 지탱해 주는 '기억의 완충재'가 된다. 한마디로 상대에게 '이것 만은 내가 확실히 받았지'라는 기억을 하나 정도 심어두자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아픈 기억을 훨씬 크고 선명하게 새긴다. 다툼이라는 거대한 타격을 견뎌내기 위해 거창한 화해의 이벤트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평소에 정확히 조준된, 작지만 확실한 긍정의 기억들을 5배, 10배로 겹겹이 쌓아두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레쓰비 캔 하나는 그저 커피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 계좌가 파산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가장 경제적이고 확실한 방어막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관계를 지속하기 위한 정교한 기술을 함께 익혀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배려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고, 상대가 내미는 투박한 배려 속에서 진심을 읽어내는 기술 말이다.
상대가 원치 않는 배려는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다. 아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상대가 모르는 배려는 배려가 아니라 기껏해야 피로한 간섭으로 돌아올 뿐이다. 아무리 내가 '당신을 위해 이만큼이나 노력했다'고 목소리를 높여 본들, 상대의 렌즈에 맺히지 않은 진심은 그저 나 혼자 안도하고 끝낸 자기만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여 상대의 보이지 않는 배려를 뒤늦게 깨닫게 되는 순간은, 대개 그 상대가 내 곁에 없을 확률이 높다. 나는 과거 부모님의 뒷모습에서 보았던 그 엇갈린 진심들을 생각한다. 두 분은 평생 서로를 향해 정성껏 진심을 쏘아 올렸지만, 안타깝게도 서로의 렌즈 도수를 확인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 차가운 평행선 끝에 남은 건 닳아버린 마음과 "내가 어떻게 했는데"라는 억울한 메아리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곁의 사람이 볼 수 있는 렌즈로, 그의 도수에 맞춰 하나의 배려를 건네기로 한다.
「 」
당신이 정성껏 부은 진심이 지금 상대의 독에 잘 담기고 있나요? 혹시 상대는 원치 않는 배려를 하느라, 당신의 귀한 진심을 바닥으로 헛되이 흘려보내며 '콧방귀'를 뀌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 한번 살포시 물어보세요.
"내가 건네는 이 마음, 당신의 렌즈에는 어떻게 보이나요?"
상대의 렌즈 도수를 안다는 것은 지레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 내어 질문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하는 이 행동이, 당신에게는 잔소리로 느껴지나요, 아니면 사랑으로 느껴지나요?'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나의 안경을 벗고 상대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