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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Oct 03. 2016

D113. 고마워, 안데스!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페루


“첫 번째 팀플레이!”


와, 이번에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며칠씩 함께 지내는 그룹 투어에서는 만나는 사람들이 중요한데 매번 운이 참 좋다. 3박 4일짜리 산타크루즈 트렉킹을 시작되는 날. 이른 아침부터 부스스한 얼굴로 모여 서먹하게 차를 타고 출발 지점까지 이동하던 중이었다. 비가 많이 내린 탓에 진흙탕이 되어버린 산길에서 꿀렁꿀렁 앞으로 겨우 나아가던 차가 멈춰버렸다. 진흙에 바퀴가 빠져버린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내려 서로 앞장서서 차를 밀기 시작했다. 그냥 걸어 올라가기도 힘든 미끌 거리는 언덕길에서 한참이나 밀어야 했지만 여럿이 힘을 합치자 헛돌던 바퀴는 결국 자리를 다시 되찾았다.


트렉킹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옷과 신발이 진흙투성이가 되었지만 모두들 기쁜 얼굴로 괜찮은 팀플레이였다며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앞으로의 일정이 한껏 더 기대가 된다.




페루 북부의 높고 광활한 안데스, Cordillera Blanca.


이스터섬 비행기 날짜에 맞추느라 에콰도르부터 한 번에 남쪽으로 쭉쭉 달려왔는데, 결국 페루의 안데스를 포기할 수 없어 다시 북쪽으로 한참을 되돌아왔다. 하얀 산맥이란 뜻의 이 동네에는 유명한 산봉우리들이 이름을 다 댈 수 없을 만큼 많다. 와라스(Huaraz)는 그 수많은 산맥들로 트렉킹을 떠나는 거점이 되는 마을이다.


와라스에 오자고 한 건 Y였다. 무언가 강렬히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먼저 무엇을 하자고 말을 하지 않는 그이기에 그가 하자고 하는 건 '정말 많이' 하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 그가 산타크루즈 트렉킹은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뭔지도 모르고 좋다고 했다. 딱히 산을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었지만 (물론 그도 아니었다), 푸른 곳도 좋아하고 걷는 것도 좋아하니 푸른 곳에 오르는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에콰토르에서 쏟아지는 우박을 맞으며 코토팍시에 다녀온 후부터는 고산 트렉킹에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생겨버린 후였다. 더군다나 여긴 안데스 아닌가! 안데스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산세가 펼쳐져 있다는 곳!








"원래 트레일이 하나 있고, 원래 트레일보다 조금 더 어렵지만 더 멋진 경치를 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어. 어디로 갈래?"


가이드 리카르도가 잠시 길을 멈추고 묻는다.


"쉽고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길을 없어?"


내가 묻는다.


"No pain, no gain!"


앤디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한다.


고생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건, 인생의 진리인가보다.





그리고 우리는 저 벽을 타고 올랐다.









4,750m Punta Union!





즐거운 산행 뒤 하루의 마무리는 다 함께 모여 앉아 따끈한 코카 차를 마시는 일. 고산병에 대비해 자꾸만 차를 많이 마셔야 한다고 권하는 데이빗 아저씨에게 모두들 잔소리쟁이라고 농담을 하면서도, 서로의 컨디션과 기분을 살뜰히 챙기며 그날의 피로를 풀어낸다. 함께 걸어온 엄청난 풍경을 되새김질하고 나면 어느새 사는 이야기로 화제는 전환된다.


“지난 대선에서 극우 보수당 후보가 당선되는 줄 알고 너무 무서웠어.”

 

미국에서 온 이반이 대화를 시작한다.


"너네가 그런 불평을 할 때가 아니야. 우리나라는 어떤 사람이 됐는 줄 알아?"


내가 말을 이어가려는데 이번에는 벨라루스에서 온 로만이 가로챈다.


“나는 20년째 한 사람이 독재 중인 나라에 살고 있어. 내가 자라서 기억이 있는 동안은 줄곧 한 사람이 대통령이었다니까.”  


“야... 우린 선거도 없어!”  


비가 내리는 우기라 산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기. 남미의 다른 여행지에서도 마주치기 쉽지 않은 국적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며 함께 신기해한다. 벨라루스, 그리고 홀로 여행하는 중국인 여행자라니.







데이빗 아저씨 말대로 코카 차를 열심히 마시면서도 걸음이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많이 힘겹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금방 숨이 차오르는 기분은 바다에 있는 동안 잠시 잊고 지냈지만 에콰도르부터 이미 익숙한 느낌이다.


하지만 밤이 되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잠이 오질 않는 것이다. 내 유일한 고산 증상이 불면증이 될 줄이야. 하루 종일 걷고 피곤해 죽겠는데 밤새 잠은 오지 않고 말똥말똥. 거기다 높은 산 위의 텐트 속은 어찌나 추운지. 춥고 잠은 안 오고, 또 고산에 좋다고 코카 차를 잔뜩 마셔놨더니 화장실은 자꾸 가고 싶다. 텐트 치고 자는데 '진짜 화장실'이 있을 리 없는 산속. 캄캄한 밤에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는 텐트에서 떨어진 곳까지 가려면 결국 옆에 자고 있는 사람까지 깨워야 하니 어떡하나 고민하다 꾹꾹 참고 뒤척이는 사이 아침이 밝아온다.


새벽 내내 추위에 떨다 일어나서 텐트를 정리하려니 몸이 천근만근. 한라봉 같이 부은 얼굴로 한국에서 산에도 잘 안 가던 사람들이 대체 여긴 왜 온 거냐며 옆에 있는 그에게 괜한 투정을 부린다.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텐트 문을 열어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나도 모르게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그를 찾는다.


"얼른 나와 봐봐!"


여기 왜 왔냐고 뱉어놓은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주워 담고 싶다. 이런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 아니 지금 이 광경을 보며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스러운 산세다.


이 맛에 산에 오르는 거구나! 과연 안데스!










“Life is good today!”


누군가 외친다. 우기임에도 불구하고 성수기에 나올 법하다고 감탄할만한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전날의 구름은 어디 가고 맑은 하늘 아래 산을 만나니 360 도, 동서남북 어디에 눈을 두고 걸어야 할지 정신이 없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내 눈 앞에 아름답고 거대한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이다.  


이런 맑은 하늘, 정말 기대도 안 했는데. 나와서 길 위의 시간을 보내보면 어느 것 하나 나의 노력만으로, 나의 '덕'으로 되는 것이 없다. 나의 오늘도 자연이 만들어 주어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 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고맙다.


정말 고마워, 안데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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