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icgirl Oct 22. 2016

D153. 그대, 잘 살고 있나요?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칠레와 아르헨티나

헐렁한 긴팔에 반바지 차림을 좋아하지만 원하는 온도를 만나는 날은 일 년 중 고작 며칠뿐이다. 따스하고 선선한 산티아고의 휴식은 그렇게 짧기만 했다. 머릿속에는 온통 파타고니아, 겨울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파타고니아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푸콘행 야간 버스를 타러 가기 위해 다시 짐을 싸는 짝꿍의 얼굴이 꽤나 우울해 보인다. 이걸 또 시작해야 하냐며 한숨을 내쉰다. 이걸 또 시작해야 하냐니. 우리의 여정은 아직도 초반일 뿐인데.


말로만 듣던 여행 슬럼프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고대하던 남쪽 마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다행히 그의 우울함은 사라졌다. 바람이 그의 기분을 어루만져준 걸까. 밤사이 비가 내렸는지 촉촉한 푸콘의 새벽 공기에서 나무 내음이 난다.


그런데 여기, 너무 춥다.


고산지대에서 내내 입고 있다 딱 일주일 벗어던졌던 겨울옷들을 마지못해 다시 꺼내 입으려니 이번에는 내가 우울해진다. 카리브해 이후 여름옷은 배낭 깊숙이 처박혀 볕도 보지 못하고 있다.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버스로 8시간 내려왔을 뿐인데 이 정도면 진짜 저 남쪽의 파타고니아는 얼마나 추우려나.





비야리카 화산과 호수에 둘러 싸인 작은 마을에는 낮은 나무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집집마다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있다.


작은 창으로 설산이 보이는 방을 잡고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한다. 따끈하게 몸을 녹이니 코 끝에 내려앉는 찬 공기가 두렵지 않다. 후하! 후하! 콧구멍을 크게 열어 조금이라도 더 들이마시고 싶은 신선하고 푸른 공기.


이렇게 또 금세 사랑에 빠져버리다니.


쨍하고 뜨거운 태양만 찾아다니던 나를 남미는 고산의 하늘로 유혹하더니 이번에는 파타고니아의 바람으로 새로운 계절을 만나보라 속삭인다.






비야리카 화산 트렉킹
Villarrica Volcano


나무도 많고 물도 많은 푸콘. 이름도 예뻐서 자꾸만 불러보고 싶은 푸콘.


산과 호수, 그리고 강에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푸콘의 여름 성수기는 2월까지라고 한다. 3월 초인데도 벌써 산 위에는 얼음이 덮이기 시작했다. 흐렸다 맑았다 아슬아슬한 하늘 때문에 설산에 오르는 트렉킹은 출발하는 날 새벽이 되어야 날씨를 보고 가능한지 알 수 있단다.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트렉킹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채비를 하려니 귀찮음이 몰려온다. 여행사에 도착하니 가능하다고 하는데, 돌아가 다시 눈을 부치려 했던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까지 하다.


눈과 얼음 위를 걸어야 하는 트레킹이라 방수가 되는 옷부터 헬멧과 부츠, 아이젠까지 모든 장비를 모두 갖춰야 한다. 장비를 체크할 때 나와 짝꿍은 몇 분 걸리지 않는데, 함께 간 프랑스 부부는 크다, 작다, 주머니가 이상하다며 한 시간이 넘도록 고르고 바꾸고를 반복한다. ‘좀 대충하지,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굴까.’ 생각했는데 막상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과 미끄러질 것 같은 얼음 산에서 부츠 때문에 발이 아파오니 ‘나도 꼼꼼히 고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안 그래도 보여도 싫은 소리 잘 못하는 한국 사람인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새벽잠을 이겨내고 나왔건만 어둠이 걷히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산 위에 선다. 까탈스러운 프랑스 부부가 한몫했지만 왠지 가이드 아저씨가 시간을 끄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트렉킹을 일단 시작해도 날씨가 안 좋으면 중간에 내려올 수 있는데 그럴 땐 투어비를 환불해주지 않는다는 여행사의 말이 귀에서 맴돈다.


'그래도 설마,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중간에 포기할 일은 없겠지.'





온 세상이 하얗다.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얼음꽃이 피어있고 산 아래로는 구름과 푸른 산과 호수가 겹겹이 펼쳐져 장관이다. 신이 나서 지치는 줄도 모르고 얼음길을 걷다가 두꺼운 방수 점퍼 안이 땀으로 다 젖고 나서야 드디어 정상이 보이는 지점에 다다른다.







하지만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몰려드는 하얀 구름 떼.





순식간에 구름에 묶이고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화이트 아웃. 모든 것이 하얗게 보여서 방향과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는 그 화이트 아웃이다.





신비로운 기분은 잠시, 위험해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가이드의 말이 들려온다. 역시 저 아저씨는 오늘 정상에 오를 마음이 없었던 거였어. 구름이 걷히길 기다려 오르면 안 되냐고 물으려는 찰나, 옆에 있던 프랑스 부부가 열을 올린다. 날씨 때문에 일주일이나 기다렸다며 이대로 내려갈 수는 없단다. 우리는 하루도 기다리지 않고 왔는데도 이렇게 아쉬우니 일주일을 기다렸다면 오죽할까. 더구나 그들도 가이드의 속내를 일찍부터 감지하고 있었을 터. 근데 너희도 아침에 시간 엄청 끌었잖아...


프랑스 부부의 고집은 거세지만 결정권을 쥔 가이드를 이길 수는 없다. 정상까지 오르는 것도 위험하지만 무리해서 정상까지 오른다고 한들, 체력을 다 써버리고 나면 이 날씨에 내려가다 자칫 다칠 수 있다는 것이다. 얄밉지만 가이드의 말이 맞다. 지금은 우리 모두 아쉽지만 정상에 오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결국 프랑스 부부는 올라가다 포기하고 내려오는 다른 그룹들을 보고 나서야 마음을 돌린다.


종종 잊어버리지만 다시금 기억해내야 한다.
올라가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런 길을 내려가야 하니까





한없이 투명하기만 한 산 아래가 야속하다. 벌써부터 눈구름에 싸여 산을 오를 수 없으니 진짜 파타고니아에 가서 트렉킹을 할 수 없게 되면 어쩌나.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트렉킹은 안중에도 없었는데 이제는 자나 깨나 트렉킹 생각, 트렉킹을 할 수 있는 좋은 날씨만 생각하고 있다.



칠레 푸콘에서 아르헨티나 산 마르틴으로 향하는 길.



기다란 칠레와 옆 나라 아르헨티나의 국경에 걸쳐 넓게 형성된 호수마을들을 퐁당퐁당 들르며 남쪽으로 향한다. 가는 곳마다 이런 풍경이 펼쳐지니 어찌 산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나.







그대, 잘 살고 있나요?
산 마르틴 (San Martin de los andes, Argentina)





한 바퀴 마을 산책을 마치고 오니 작은 광장에서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한창이다. 미소가 가득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박한 축제. 이런 산속 시골마을에서도 여성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니 아르헨티나라는 나라가 갑자기 달리 보인다. 깔끔한 칠레와 달리 어딘지 엉성한 인프라, 그러면서도 비싸기만 한 물가, 불안정한 경제 탓에 암암리에 '암'환전이 성행한다는 이야기에 불투명한 이미지가 한껏 씌워진 참이었다.


칠레부터 이어지는 이들의 '여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일상 속에서 어떤 하루의 의미를 떠올리고 평일 오후 광장에서 함께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여유. 급격히 차가워지는 공기 속에서도 묻어나는 얼굴의 여유.


경제적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지금껏 따스한 햇살만큼은 여유를 불어넣어주는 필수조건이라 믿고 있었다. 유독 추위를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사람만이 자원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추운 겨울과 잿빛 하늘을 이겨내느라 더 팍팍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내가 살아온 도시를 이해하려 애를 써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후와 햇살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의 삶에는 매일은 아닐지 몰라도 자주 '저녁'이 있을 것이고 '생각할 시간'이 있을 것이며 함께할 '이웃', 위로가 되어줄 '숲과 호수'가 있었을 것이다.


먹고사는 일이 힘들어지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쳐도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 하찮아지지는 않는 것이었다.





가끔, 어딘가를 여행 중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묻곤 한다.


"그 나라는 어때? 잘 살아?"


글쎄, 과연 잘 살고 못 산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너와 나, 지금 ‘잘’ 살고 있나?

그대, '잘' 살고 있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D149. 다시, 3월의 가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