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icgirl Oct 25. 2016

D163. 둘이 여행하면 안 싸워요?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칠레 


"둘이 여행하면 안 싸워요?"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동행인지, 단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인지, 연인인지, 남편인지, 누가 먼저 여행을 떠나자고 했는지, 그리고 빈번하게 다투지 않는지.


"거의 안 싸워요."


굳이 포장할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연애할 때부터 크게 다퉈본 기억이 없다. 그와 나는 참 많이 다르고 딱히 성숙하지도 못한 인간들이지만, 다행히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의 차이가 문제 된 적이 없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는 타고난 것이라 가끔 길 위에서 목청껏 다투는 연인들을 볼 때면 괜히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물론 다툼의 기준 또한 다르기에 그는 나와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여행을 떠나와서도 마찬가지. 배가 고파서 짜증을 부리고 길을 헤매다 배낭을 바닥에 내팽개친 적은 몇 번 있지만 불만의 화살이 상대방에게 향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오늘이 되기 전까지는.



대망의 W 트렉킹


헉헉 몰아쉬는 숨소리가 어두운 산길을 울린다. 3박 4일 토레스 델 파이네 W 트렉킹의 마지막 날이다.


계획은 그란데 산장에서 출발해 그레이 빙하까지 왕복으로 다녀와 국립공원을 나갈 수 있는 낮 12시 30분 배를 타는 것이었다. 배는 저녁에도 한번 더 있지만 어쩐지 시간이 뜨는 것보다 조금 빠듯한 편이 낫겠다 싶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매번 지도에 나온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그 날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우리였으니 여유 있을 거라며 호기로운 계획을 세워버렸다.


마지막 날인만큼 '나이트 워킹'도 해보자며 헤드렌턴을 켜고 산장을 나선다. 세상이 아직 잠들어 있는 새벽 5시. 고요한 산 속은 조금 무섭기도 해서 그의 손을 꼬옥 잡고 있지만, 태양조차 들르지 않은 길에 가장 먼저 오늘의 발자국을 남긴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린다.


얼마쯤 걸었을까. 구름이 두텁게 내려앉은 하늘에 서서히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고 캄캄한 호수 위에 동동 떠 있는 빙하 조각들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한다. 얼음 조각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저 멀리 호수 끝, 오늘의 목적지 그레이 빙하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보이는 것들이 늘자 발걸음을 옮기기 한결 수월하다. 그러나 곧 다른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한다. 분명 아까부터 그레이 빙하를 바라보며 걷고 있는데 눈 앞의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는 건 기분 탓인가? 시계를 보니 이미 그레이 빙하 앞에 도착했어야 하는 시각. 하지만 오르락내리락 빙빙 돌고 있는 길 위에서 빙하는 여전히 닿을 수 없는 그대일 뿐이다.


'어둠'을 간과한 탓이다. 가는 빛줄기에 의지해 걸어오는 동안 평소보다 걸음이 느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의 능력을 너무 과신했다.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마음을 다독이는 사이 갑자기 그의 발소리가 멈춘다. 이대로 가다간 배를 놓칠 것 같으니 그냥 돌아가자고 한다.


"진심이야?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그레이 빙하를 앞에 두고 돌아가자고?"


나는 저녁 배를 타더라도 빙하는 꼭 보고 가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새벽부터 걸은 것이 아까워 원래대로 배를 꼭 타야겠단다. 나왔다. 요상한 고집.


여긴 토레스 델 파이네라고! 정신 좀 차려봐!


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 번은 참는다. 새벽부터 쉬지 않고 몇 시간을 걸었으니 잠깐 앉아서 같이 생각을 정리해보자고 꼬신다. 지도를 펼쳐놓고 남아있는 거리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늠해본다. 결론은 다시 그레이 빙하.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가보는 거야!


최대한 시간에 맞춰보기로 했으니 마음이 급해진 나는 걸음을 더욱 재촉한다. 그런데 뒤에서 또다시 발목을 잡는다. 어차피 배는 못 탈 테니 포기하고 천천히 가라는 것이다.


그런 게 어딨어? 일단 해보는 만큼은 해봐야지. 것도 꼭 맥 빠지게 말을 한다니까. 한껏 자극을 받은 나는 오기가 나서 결국 소리를 치고야 만다.


"싫어! 나는 그레이 빙하도 보고 배도 탈 거야! 혼자라도 갈 테니 돌아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그리고 나는 달린다. 이 산길을.







드디어 문제의 그레이 빙하 앞에 섰지만 두 사람 모두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라 말이 없다. 여느 때처럼 사진 찍는 재미도 없다. 먼저 말을 걸어볼까? 지금이라도 기분을 풀고 함께 사진이라도 남겨볼까? 이미 마음속에선 화를 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지만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자존심을 내세우는 쉬운 길을 택한다. 보란 듯이 풍경 사진 몇 장만 대충 찍고는 배를 타고야 말겠다며 발길을 돌려버린다. 앉아서 즐길 여유도 없이 제대로 한번 웃어보지도 않고 그레이 빙하는 떠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사랑스러운 3박 4일의 트렉킹을 마치면서 지금 뭐하는 짓이지? 오늘 새벽부터 여길 얼마나 힘들게 왔는데. 뛰고 있는 지금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더 쿵쾅거리던 꿈의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가 아니었던가.



둘이 여행하면 안 싸우냐고요?

어휴, 왜 안 싸우겠어요. 살면서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는,
이렇게 엄청난 자연을 앞에 두고도 싸우는 걸요.







멀리서도 죽을 듯이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걱정되었는지 어느새 그는 내 옆에서 걷고 있다. 속도조절을 해야 한다며 발을 따라 입으로 구령을 맞추는 것도 모자라 당 보충을 하라며 사탕과 초콜릿을 배급해준다. 결국 피식 웃음이 터지고야 만다. 정말 못 말리는 너란 남자. 이런 자기가 왜 웃긴지도 모르는 사람. 하지만 나만큼이나 고집불통이면서도 언제나 먼저 거리를 좁혀오는 너.


이 바보 같은 여행자들에게 토레스는 무지개를 선물하며 한번 더 기회를 준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라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을 즐기라고.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우리 꼴이 웃겨 다시 한번 크게 웃는다. 




그래, 웃자.
웃으러 왔으니 마음껏 웃자.
화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어딘지 쓸쓸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가을의 파타고니아



남겨진 순간들
토레스 델 파이네 (Torres del Paine)


길 위에서 굳이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있기를 희망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지만, 이 여행에 어떤 의미나 미션을 부여하는 순간 길 위의 자유가 반감될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애써 의식하지 않아도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들이 있다. 


너와 내가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 여행을 떠나왔는데 마음을 뺏기는 것들은 자꾸만 더 늘어나기만 한다. 물론 확실하게 싫어하게 되는 것들 또한 덤.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그런 순수함은 없다. 싫어하는 것들을 억지로 할 필요 없는 시간인만큼 좋은 것도 딱 좋은 만큼 느끼면 될 뿐이다. 다만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이 두근거리는 것들이 자꾸만 나타나니 마음이 알아서 따라갈 뿐이다.


언제부터 이토록 산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안데스를 지나면서였나. 걸으면 걸을수록 남쪽의 파타고니아는 꿈의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토레스 델 파이네를 마주했다.



파스텔빛 호수 위에 우뚝 솟은 세 개의 바위기둥, 유명한 그 토레스의 삼봉



W 트렉킹은 3박 4일, 4박 5일 혹은 그보다 더 길거나 짧게 원하는 대로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보통은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코스가 바람을 타고 걷기 더 좋다고 한다. 우리는 마지막 날 다소 흐릴 수 있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코스를 택했다. 


그래야 화창한 하늘 아래 토레스의 삼봉을 만날 수 있으니까!





웅장한 세 개의 기둥도 멋지지만, 그보다 기둥과 바위에 둘러싸인 연둣빛 호수가 신비롭다. 한번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 도무지 털고 일어날 수는 마법의 공간.



딱 내가 상상했던 파타고니아



우리에게도 이렇게 완벽한 날씨 속에 걸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무시무시하다는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구경도 할 수 없이 아침부터 땀에 흠뻑 젖어버리곤 했다. 











기울어진 나무들만이 평소의 바람을 짐작케 할 뿐. 그 유명하다는 파타고니아의 바람, 우리도 좀 맞아보자던 농담이 쏙 들어간다.

















붉게 물든 아침.






프렌치 밸리 (French Valley)


삼봉보다 더 놀라웠던 프렌치 밸리의 파노라믹 뷰. 등산화를 벗고 누워 발가락 사이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날 때의 그 행복이란! 파타고니안 파라다이스가 있다면 바로 이곳! 











파타고니아의 모든 트렉킹이 그러했지만 W 트렉킹 또한 마실 물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 산을 타고 흐르는 깨끗한 물로 그때그때 목을 축이면 그만. 물맛이 기가 막혀!














일기예보처럼 마지막이 다가오자 구름이 두텁게 쌓였다. 국립공원의 동쪽에 진입하니 몇 년 전 이스라엘 등산객의 실수로 불타버린 나무들이 씁쓸함을 더한다. 그동안 구경 못한 파타고니아의 바람까지 왠지 더 쌩쌩 불어오는 것만 같다.



마지막, 그란데 산장으로 가는 길



트렉킹을 마치고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와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꿈을 꾸고 난 듯 산에서의 시간이 벌써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있다. 비행기 창밖으로 꿈의 산맥을 만나던 순간, 버스를 타고 다가가며 삼봉을 만나던 순간의 쿵쾅거리던 심장소리는 여전히 생생한데 산에서 보낸 3박 4일은 선명해지지 않는 꿈속의 시간처럼 멀기만 하다.


너무 좋아서, 그 어떤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넋을 놓고 끝나버린 사랑처럼 넋을 놓고 걸었던 걸까. 눈을 감고 있어도, 밥을 먹고 있어도 자꾸만 떠올라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잠시라도 스쳤던 곳 하나하나 언젠가 다시 돌아와야 할 곳들이 되고 있다. 추억의 부글부글 그레이 빙하도!













매거진의 이전글 D153. 그대, 잘 살고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