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평범한 날 저녁의 사색
유독 생각이 많은 날이다.
생각은 다양한 형태로 내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때로는 이미지로, 때로는 음성으로, 때로는 설명 불가능한 추상적인 개념의 형태로 머무르다 간다.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생각들이 휘몰아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마치 무거운 수증기를 머금고 하늘에 꽉 차있는 먹먹한 구름 같다.
지금까지 많은 심리학자, 철학자, 과학자, 사회학자들이 "생각"이라는 게 뭔지 명확하게 정의하려는 시도를 많이 해왔다.
하지만 여러 책을 읽다 보면 여전히 하나의 언어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내용들을 토대로 "생각"이라는 개념을 표상하는 용어들을 정리해 봤다.
순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고, 이 글은 그래서 "생각에 관한 생각"이다.
첫 번째, 생각은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쉽게 말하면 그물망 같은 형태이다.
보통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면, 딱 한 가지 심상이나 개념만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 건 아니다.
여러 개의 이미지/언어/소리/느낌/개념 등이 내 마음속 혹은 머릿속에 버무려져 있다.
그렇다고 머릿속 공간이 여러 개라서 한꺼번에 어러 개의 개념들을 따로따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다.
하나의 공간 안에서 여러 개의 노드(Node)들이 각각 연결(Edge)되어 있는 형태라고 볼 수 있겠다.
두 번째, 생각은 감각 기관을 동반한다.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들이 외부 자극 없이도 활성화된다는 말이다.
특히 이미지나 소리와 같은 형태는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블랙 미러>의 '악어' 편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해당 시리즈는 미래에 일어날 법한 어두운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영화 상에서 "리콜러"라고 하는 장치가 등장하는데, 사람의 머리에 에어팟 같은 조그만 기기를 연결하기만 하면 이 장치를 통해 그 사람의 기억을 모니터로 직접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는 기억을 해당 시점에서의 이미지와 소리의 조합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지심리학의 작업기억 이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외부 자극은 인지 단계에서 소멸되지만, 특정 정보들은 단기 기억이나 장기 기억으로 변환되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나는 이 이론이 생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생각은 연속적이면서 연쇄적이다.
생각은 아무런 맥락 없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이전에 겪었던 일이나 지금 인지하고 있는 외부 자극에 의해서 생겨난다.
그리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는 표현이 존재하듯이 계속해서 다음 생각으로 이어진다.
위에서 설명했던 네트워크 가설에 따르면, 어떤 개념이 떠올랐을 때 네트워크에서 연결되어 있는 다른 개념을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이라는 건 반드시 인과성을 지닌다고 보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어떤 청년이 사고를 겪은 후 갑자기 러시아 말을 하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신기해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네 번째, 생각은 뇌 화학 작용의 산물이다.
보통 뇌 과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신경절달물질"의 산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요즘은 과학 기술 분야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등 신경전달물질로 사람의 생각 과정을 설명하려는 유튜브들도 많이 생겨난 것 같다.
나도 물론 이런 심상이나 느낌은 어떤 뇌의 화학 작용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며, 아직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의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인간은 아직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설득당했다.
어쨌든 아직은 생각이 뭔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생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다섯 번째, 생각 그 자체는 설명할 수 없지만, 표현할수록 뚜렷해진다.
어쨌거나 이 글의 결론은 생각을 직접 꺼내서 해부해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생각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는 있다.
지금의 나처럼 '글'로 작성해서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그림'이나 '음악'을 통해서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갑자기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거나 물건을 구매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표현할 수도 있다.
표현 방식은 사람마다, 그리고 시기마다 다양한 것 같은데,
나는 '글'을 작성하는 방식이 익숙하기 때문에 글을 통해 생각을 꺼내보기로 했다.
나는 심리학 전문가도 아니고,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이 글이 누군가의 생각에 의도치 않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사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미래의 내가 지금 나의 머릿속을 궁금해할 것 같아서다.
그리고 글로 생각을 정리하면 머릿속이 편안해져서 쓴다.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한 글이다.
누군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내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와 이 글을 읽을 누군가의 머릿속을 멀끔하게 해 줄 만한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써볼 생각이다.
참고 서적:
- 제롬 케이건.『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 김성훈(옮긴이). 책세상,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