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연 Dec 30. 2021

V For Vendetta

정치는 국민의 삶을 예술로 바꿔주는 것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

V가 정의했다. 이것이 예술이라고.

껍데기는 허구일지라도 그 안에 진실을 담고 있는 게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V는 또 하나를 규정했다.

“진실을 덮기 위해 거짓을 이용한다”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 정치인이다.


<V For Vendetta>는 복수(復讐)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수를 하는 V에 대한 영화이다. 그러나 끝내 단수는 복수(複數)가 된다. 한 사람의 V가 다수의 V가 되어 광장에 집합한다. 이비는 그들을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며 남동생이고 내 친구이다, 또한 너이며 나이고, 우리 모두이다” 이 복수의 주체가 복수하려는 대상은 예상하는 그대로, 권력자들이다.



복수는 왜 필요했을까. 그 유명한 서평가 미치코 가쿠타니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의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선동과 정치 조작에 쉽사리 영향받고 국가가 예비 독재자의 손쉬운 희생물이 되게 하는 상황과 태도 말이다. 사실에 대한 무관심, 이성을 대신한 감성, 좀먹은 언어가 어떻게 진실의 가치를 깎아내리는지, 그리고 이것이 미국과 세계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검토하려 한다.”


단지 미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인지상정이다. 이미 우리 사회 안의 거의 모든 가짜를 경험했다고 믿었는데 올 한 해만도 여전히 새로운 가짜와 가짜의 잉여물에 혀를 내두르는 우리들을 발견하고 있잖은가. 그러니 위의 가쿠타니의 말처럼 (권력자들의) ‘선동’과 ‘정치 조작’, ‘예비 독재자의 출현’은 (국민의) ‘사실에 대한 무관심’, ‘이성을 대신한 감성’, ‘좀먹은 언어’와 정확히 등치하며 한 사회를, 한 국가를 파국으로 견인하고 마는 것이다.



V의 복수는 바이러스로부터 시작되었다.

바이러스, 이것이 작금의 우리가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촛불을 들었음에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되레 후퇴를 감각하게 하는 이 상황은 V의 복수를 초래한 바이러스를 바로 연상케 한다. 많은 것을 잃게 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일깨우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모태가 혹 영화 안의 저 바이러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결코 과하지 않으리라. 하여 어쩌면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되어 생장과 변이를 반복하면서 절멸하지 않는 바이러스만이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추동력이 아닐까 하는 가정 또한 무리가 아닌 것이다. V의 복수가 역사 속에서 시대의 변곡점을 분만한, 과도기적 한 시점의 발악이었을 뿐일지라도 V를 주목하지 않고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을 터.


V의 존재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은 복수의 지향을 묻는 것이다. 권력자들을 없애는 것만이 그가 하려는 응징의 전부였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느슨히 본 것이다. 친절하게도 그는 직접 그 답을 알려준다.


“내가 만든 세상은 오늘밤으로 끝나. 내일은 새로운 세상이지,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가야 할 세상. 이건 그들의 몫이야.”


응징은 내가 해줄게, 그러나 새로운 세상은 너희가 만들어가야 해, 부디 희망의 새 세상을 만들어줘... 하는 게 V의 일성이었다. 그렇기에 V의 응징은 절대로 일방을 향하지 않았다. 피로써 응징할 자와 더불어 권력에 기생 내지 굴복하는 시민들을 향해서도 적소를 향한 일침을 가했던 것.


“이렇게 되도록 만든 범인이 누군지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거울을 보십시오!”


두려움과 회피를 일삼는 이비에게는 더욱 잔인한 방법을 서슴지 않는다. V의 돌올한 뜻을 이해하는 세상유일의 사람이 이비였기에 한 때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V는 그녀를 죽음의 문턱에까지 데려다 놓는 것이다. 누구라도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마침내 이비가 죽음에 맞설 용기를 보이자 그는 그녀를 놓아준다. 절해고도의 절벽 앞에서 각성된 이비. 그녀를 각성시킨 것은 두려움이 없는 자만이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는 무서운 진실이었다.


사소한, 무수한 발자국들 위로 큼직하고 깊게 찍히는 발자국 하나. 덜 마른 콘크리트 위에 남겨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장구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든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의 낙인을 찍고 주저앉은 다리를 일으켜 다시 사소하고 무수한 발자국을 생성해낸다. 그렇게 복제된 수많은 V. 자, 이제 어디로 어떻게 전진할 것인가.



- 일상적 파시즘을 깨부수어라!


미셸 푸코는 ‘미시 권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시 권력은 국가 기구 바깥에서 섬세하게 작동하는 권력 즉, 우리의 삶을 규정한 일상적인 권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미시 권력의 변화에 따라 권력의 효과가 좌우된다.”(『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p177, 강준만 저, 인물과 사상사, 2020)


권력의 효과가 미시 권력에 달려 있다, 이 말은 결국 수많은 V가 만들어내야 할 것이 바로 이 미시권력이라는 뜻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언론, 경찰, 은행, 종교, 과학자 등 전문가집단 등도 전부 거대권력이거나 그것에 비근한 권력집단이다. 진정한 미시권력의 주인은 시민이다.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른 채 광장에 모여 국회의사당의 폭파를 두 눈으로 목도하며 내일을 꿈꾸는 동시에 내일을 만들어가야 할 바로 그들.


역사학자 임지현은 푸코에서 더 나아간다.

“문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규율, 교묘하게 정신과 일상을 조작하는 고도화되고 숨겨진 권력 장치로서의 파시즘이다.”(『당대비평』(1999년 가을호), 위의 책 p179에서 재인용)


임지현은 이것을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명명한다. 미시 권력을 파고들어 파시즘을 행사하는 권력은 대체 무엇인가. 가쿠타니를 위시한 많은 전문가들은 그것의 하나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꼽고 있는데 굳이 사상과 논조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페북이라는 이 작은 공간과 커뮤니티 안에서도 크고 작은 선동과 편향, 가짜뉴스가 판치고 있으니.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 대한 인신공격과 조롱까지도 난무한다. 갑이 원하는 싸움은 을들의 싸움이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링 위로 을들이 올라가 서로 죽어라 난도질하는 꼴을 원한다. 을들은 마리오네트 인형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인형들끼리 싸우는 동안 그들은 국민들의 공포를 조장할 프로파간다와 음모와 또 다른 바이러스를 제조, 배출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일상적 파시즘을 깨부술 무기는 무엇인가.

한 사람의 V? 아니면 복제된 복수의 V?

그보다 더 우선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신념’이다.


“이 가면 뒤에는 육체도 있지만 신념도 있어. 총알도 뚫지 못하는 신념.”


너는 왜 총을 맞고도 죽지 않냐는 물음에 V가 대답했던 이 말.

애초에 V에게 신념을 주었던 가이 포크스가 남기고 싶었던 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사람은 실패해도, 신념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22년, 세상을 바꿀 시간을 앞두고 우리는 어떤 신념을 되찾고 지켜내야 할 것인지.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에 잠시 이 영화를 보며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작가의 이전글 [윤여정 특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