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 여권

여권을 보며 떠올랐던 과거의 추억담

by 깔깔마녀

서랍을 뒤지다 옛날 여권을 발견했다. 초록색은 내 것, 짙은 남색은 오래전에 아빠가 가지고 계셨던 여권이다. 20세기의 여권과 21세기의 것은 모양도 다르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는 11~21페이지(스탬프 찍는 부분만) , 후자는 7부터 47 페이지다. 낱장수가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은, 보다 더 여행이 자유로워졌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대한민국의 여권 경쟁력은 아시아 국가에서 2위를 차지한다."라고 들었으니, 여권의 두께가 달라질 수밖에. 게다가 예전에는 해외에 나가면 세계 어딜 가도 중국 사람밖에 없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여기가 대한민국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말이 실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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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보면 생각나는 일이 두 가지 있다.


1. 인종차별이었을까?


독일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유로라인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국경 이동 중간에 승객의 여권을 검사한다. 영국에서 독일로 이동할 때는 여권을 확인 후 바로 제자리에서 돌려주었는데, 이번에는 몇몇 승객의 여권을 가져간다. 가만히 살펴보니 유색인종(인종차별 의도는 없다. 달리 표현할 말을 못 찾겠다.)과 차도르(또는 히잡)를 쓴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는데 내 것도 들고 가버린다! 여행을 다니며 입국 심사는 늘 무사통과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으니 가슴이 콩닥거렸다. 살면서 처음 겪는 일에 당황스러웠지만,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솔직히 겁났다. '말로만 듣던 어느 조용한 사무실로 불려 가는 건 아닐까? 아......' 선택받아도 기분 나쁘긴 처음이었다. 가끔 무작위로 가방 검사하는 것은 봤지만, 여권은 다르다. 여권이 없으면 여행은 끝이고, 내 존재와 입지도 위험해진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돌려받았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영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잠만 잤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음 날 아침햇살에 눈을 뜨며 무사히 돌아온 나를 발견, 어느새 "다음 목적지는 어디가 좋을까?"


2. 길에서 만난 천사들


이번에는 벨기에 여행 때다. 유로스타 첫차를 선택했고, 새벽 출발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다. 2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브뤼셀은, 수도임에도 무척 조용하고 겨울이라 더더욱 한산했다. 걸어 도착한 시내 역에도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중앙역에 도착 후, 플랫폼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데, 뒤에서 "마담" 하고 부른다.

돌아보니 십 대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내게 뭔가를 내미는데, 노란 사각형을 보는 순간, 노랗게 질릴뻔했다. 소리는 지르지 않았지만 그 당시 나는*뭉크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줄 알았다.

함께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내 여권케이스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게 왜 거기 있지?' 캐리어 하나와 앞으로 맨 홀더 백이 전부였고 누구와 부딪치거나 스친 기억도 없으니 손에 쥐고 있다가 떨어뜨린 게 분명하다. 여권을 돌려받으며 감사하다는 말만 계속 해댔다. 너무 고마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당신들은 나의 은인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다행히 *착한 사마리아인 덕분에 여행도 무사히 마쳤고, 그날부터 지금껏 벨기에를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간혹 벨기에 소식이 들리면 그때의 금발머리 여자아이들이 떠오른다. 연락처라도 받아두었다면 수시로 안부를 전했을 텐데......


여행을 하다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방인인 여행객 입장에서는 엄청난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다.

문득 돌이켜보니, 여행을 통해 배운 점이 많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도 다시 생기는 것 같다. 이렇게 그 날을 회상하고 글을 적을 수 있는 것도,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도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었다. 일일이 그들을 나열할 수 없으니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라고 말해두자. 바로 '여행운!' 그리고 작지만 소중한 '여권!' 스탬프 수집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 물건 덕분이라고! 새삼스럽지만, 그때 내 곁으로 돌아온 여권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여권을 갱신했다. 표지가 빳빳하고, 초록색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마지막 여행지는 2019년 10월 방콕. 그리고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나와 함께 여권도 방콕 신세다. 당분간 페이지를 넘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오래되든 새것이든 모두 내 여행의 역사가 담겨있어 특별하고, 도장만 봐도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한가득이다. 여행을 못가도 아쉽지 않은 지금, 여권을 들여다보며 과거로 돌아가 본다. 이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방구석 여행, 트렌드세터의 자세 아닌가~'



IMG_16431.jpg 나의 여권 케이스, 아직 잘 보관하고 있다. 지문이 나올까봐 잘랐다.


*유로라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공항까지 거리가 멀어 (숙소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10분) 유로라인을 선택했는데, 한 번의 경험이면 족했다. (의자는 제법 편했고 다리도 불편하지 않았다. 화장실 상황은 그때그때 다를 것이다.)

* 뭉크의 <절규>

* 착한 사마리아인-도움을 받았기에 그렇게 말했다. 종교와는 무관하다.

*여권( 旅券): 여행할 권리라는 것은 내가 붙인 제목일 뿐이다. 말줄임 하듯, 여기서 권은 문서를 의미한다. 즉 여행을 승인하는 증서, 문서. 괜히 오해 없기를 바라며, 더 자세한 것은 검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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