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도전, 또 다른 시작으로 빛나길
"시작이 반"이라는데, 시작만 하면 모든 일을 쉽게 끝낼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해보기 전에는. 나는 시작만큼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놀라운 반전이나 인생 역전 드라마는 아직 없다. 그건 영화 속 주인공 이야기. 그럼에도 깨달은 것은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며 열정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사실. 우물쭈물하다 보면 하고 싶던 마음도 시들어진다. 그러니 여러분은 생각났을 때 얼른 시작하길 바란다. 여전히 걱정된다면 어느 영화감독님의 가훈을 기억하자. 바로 “아니면 말고”
나의 사소한 도전은 10년 전 한 편의 영화에서 출발한다. 15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맹인 영화관>. 주인공이 앞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 내용을 해설하는 데, 순간 머릿속에 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이거다! 운 좋게 몇 개월 뒤, 점자도서관의 낭독 재능기부 공고를 발견하고, 곧바로 오디션을 본다. 마침 다른 곳도 알게 되어 두 번 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나의 안테나는 지치지 않고 또 다른 길을 찾았으니, 미디어 센터의 대면낭독 교육이었다. 허상과 환상만 쫓는 줄 알았는데, 끌림의 법칙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기다린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지만 배우는 동안, 나도 성우였고 아나운서였다.
그리고 같은 해 영화제 기간에 한통의 전화가 왔다. “배리어 프리 영화제에 교육생 모두가 참여하게 되었어요. 이틀 후 녹음입니다.” 아! 2002년 월드컵이었지?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내려받은 대본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7명의 단역을 연기하려니 막연하고 막막했다. 녹음한 목소리를 들어보니 별 차이가 없다. 낯설고 어색해서 수없이 반복했고 결국 목이 쉬었다.
드디어 당일.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연기자라는 사실에 충격받았고, 이미 작아져 버린 나는 이 시간을 '빨리 감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막다른 골목, 인생에서 '되감기' 기능은 없다. 예상과 달리 극의 흐름이 빠른 데다, 모니터의 시계를 보니 숨이 멎을 것 같다. 심장박동 소리만 들리고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토시 하나라도 틀릴까 봐 대사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홀린 듯 후반부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잠깐." 작가가 대뜸 나를 지목하며 “목소리가 서로 비슷한데, 쉬면서 캐릭터 연구 다시 하세요.” 곧바로 침묵과 함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천의 목소리도 아닌데...’ 대역죄인이 돼버렸으니 그냥 도망칠까. 대놓고 지적당하긴 처음이라 진땀만 흘리며 넋 놓고 있는데, 주연자의 한마디 덕분에 용기를 낸 것 같다. 무사히 끝났지만 인사도 하지 않고 녹음실을 빠져나왔고, 하루 종일 그 일이 생각나 온몸이 화끈거렸다. 내 목소리를 확인할 자신이 없어 영화관에도 가지 않았다. 인생을 편집한다면 바로 그 장면이고, 기억을 지워줄 알약이 있다면 관객 모두에게 선물했을 것이다.
이듬해 가을, 다시 영화제에서 연락이 왔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찾는 중인데, 목소리가 차분해서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감사한 마음에 승낙했으나, 곧바로 작년 일이 떠오른다. 정말 할 수 있는 일일까? 또다시 민폐를 끼칠까 두려웠다. 실은 오래전부터 성대결절과 후두염을 앓았고, 가을에는 비염도 심한 편이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벌써 병원을 향하였으니. 주사도 맞고 약도 먹었는데 밤이 돼도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능력 밖의 일이라는 합리적인 핑계를 대고 포기를 선택했다.
이쯤 되니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이 떠오른다. 불변의 진리 같아 부담스럽고 가끔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무시무시한 그 공통점,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노력, 옳은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새겨듣지는 않을 테다. 모두가 유노윤호처럼 열정 만수르이자 능력자는 아니니까.
한편, 내 꿈을 말하면 “꿈같은 소리네. 돈 되는 일을 해.”라고 놀리는 사람도 많았다. 이제 그런 말은 아무렇지도 않다. 시작이 반이다와 달리 끝은 아쉬웠지만, 시도한 걸로 만족한다. 주제 파악은 했으니 이만하면 절반의 성공 일까? 아니면 말고.
누구나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더라.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더라. 다른 꿈으로 대체하는 거다. 플랜 B! 가다가 멈춰도 좋으니 일단 문을 두드리자. 거절당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더라. 망설이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청해보자. 패스트 트랙이 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힘들 때 오늘의 운세 같은, 별 것 아닌 데서 희망을 찾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시하고 좋은 패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다시 하기를 반복하니, 그저 매일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 못했다고? 그럼 오늘부터 일일이다.
어느 날, 서랍에서 빛바랜 종이 한 장을 발견.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다.
진로희망란 두 글자를 보니, 성우! 이야말로 기시감? 끌림의 법칙? 이도 저도 아니면~ 말고.
이미 오래전 예고편에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