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민성 대장증후군이 뭔가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과민성 대장증후군 이야기. 여과 없이 솔직하게 쓴 에세이입니다. 조금 불편한 토픽인 경우에는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이번 시험은 꼭 잘 봐야지..’
중학생 때부터였을까.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 내가 잘 치고 싶은 시험이 있을 때마다 아랫배가 아파왔다.
첫 번째 교시에는 긴장감이 최고조였고, 시험이 시작하기 전에 꼭 화장실에 들렸다.
스무 살이 되기 전 나에게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게 유일한 목표였고, 대학에 입학하고 난 그 뒤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학생에게는 당연한 거일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시야가 좁았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크게 긴장할 일이 없었고, 시험 때만 배가 아프던 10대의 나는 잊어버렸다.
그런데, 거진 십 년이 지난 지금,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외부 거래처 손님이 방문했을 때 조용한 회의실에서 미팅을 하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온 것.
나는 그 날 점심때 먹은 치즈 그라탕을 아직도 원망한다!
유제품이 나빴던 걸까.
배가 아파왔는데 손님 앞이어서 중간에 혼자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다.
맞은편에서 하는 얘기는 점점 멀어져 갔고 머릿속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느냐는 생각뿐이었다.
.. 참다가 참다가 민망한 소리가 나왔고, 그 순간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회의실을 나와버렸다. (아마도) 같이 나란히 앉아있던 사수가 급히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나는 미팅이 끝날 때까지 회의실로 돌아가지 않고 화장실 안에서 시간이 그저 흘러가길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리라 생각하고 사무실로 돌아가니 사수는 팀장에게 방금 있었던 미팅을 보고하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으려 함과 동시에 두 사람의 눈이 나에게 향했다. 중간에 왜 나갔냐며, 배는 괜찮냐고 물어봐주는데 그 걱정 어린 질문이 왜인지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회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긴장을 하게 되었다.
조용한 곳, 밀폐된 공간, 중간에 빠질 수 없는 자리. 이 세 가지 조합이 내 배가 반응을 하는 요소.
그래서 회의가 시작하기 전엔 항상 “화장실 때문에 중간에 자리를 비우더라도 이해해달라”는 양해와 함께 시작한다. 다들 웃어 넘겨주지만 그렇다고 내 긴장감이 풀어지진 않는다.
이 증상이 다시 나타난지도 어언 2년이 되어간다.
아직도 힘들지만, 초반 1년여간은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초반에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라는 자가진단만 내리고 병원에 가기가 무서웠다.
소화기내과? 정신과? 이 증상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그냥 다 겁이 났다.
그 와중에 매일 회사에 있는 시간은 힘들었다. 조용하고 집중 잘되는 이 사무실이 괜스레 미웠다.
왜 키보드 소리랑 전화 소리밖에 안나지? 좀 더 여러 소음이 있어도 이상할 거 없는데. 하며.
조용한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보며 손가락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뇌는 온전히 배에 집중돼있었다.
이래서는 회사원 못하겠다는 생각에 그냥 회사를 관둬버릴까 싶기도 했다.
출근하고 아침 시간이 가장 민감해서, 오전 중에만 화장실을 3번 이상 갔다.
그리고 회사에 있는 시간에는 오후에 회의가 있으면 점심 메뉴는 최대한 장에 무리가 안 가는 일본식 식단을 골라서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의 소량만 먹었다. 특히 다음날 회의가 잡혀있으면 아무리 그 날 야식이 먹고 싶더라도 저녁 메뉴는 신중히 골라야 했다. 혹은 그냥 거르기도 했다.
입사 후 1년 뒤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몸무게가 5킬로가 빠졌단다.
다이어트를 해도 빠지지 않던 몸무게가 쑥 빠져버린 거다.
그리고 이 증상은 회사 내에서만 그친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영향을 줬다.
출근길 갑자기 사고로 멈춰버려 문이 닫힌 조용한 지하철 열차 안, 결혼식장 상담을 받으러 간 차분한 공간 등 소리가 없는 공간에서는 긴장을 했고 손과 겨드랑이가 땀에 젖기도 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하다 소화기내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 왈, 장 내시경 검사를 해서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특정 상황에서 계속 배가 아픈 증상이 나타나면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진단 내린다고 한다. 그렇게 인생 첫 내시경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이상 없음.
병원에서는 위장약, 과민성 대장증후군 전용 약(설사나 변비가 완화되는 약), 이 두 가지를 받았다.
플라세보 효과인지 꾸준히 먹으면서 한 때는 괜찮아지기도 했지만, 2년 정도 된 지금도 완치되지 않았다.
부모님, 친구, 회사 동료들, 상사들까지.. 많은 사람에게 솔직하게 이 얘기를 털어놨지만 궁극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얘기를 한다고 해도 모두가 모두 동정만 해주는 게 아니다. 왜 그런지 이해가 안 되는 반응, 정신적으로 약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핀잔 등 오히려 상처 받을 때도 많았다. 식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유산균을 먹어야 한다는 등 정석의 조언을 얻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회사 회의실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는 장면이나 긴장하지 않는 장면이 이제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도 저랬는데, 하면서. 당연하게 느끼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왔던 일상이 조금은 불편해졌다.
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건강식으로 먹고 약에 의존 말고 최대한 긴장을 풀 것. 이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아직도 나아지지 못했고, 아직도 친해지지 못한 과민성 대장증후군. 앞으로 여기 브런치에서 회사생활 x과민성 대장증후군 콜라보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