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경력직으로 이직했다

성골 진골 그리고 경력직

by Cookie Run

나는 국내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외국계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총 6년을 다닌 후,

국내 대기업으로 이직한 지 2년 반이 흘렀다.


나의 기대치가 충족되고 있다.

스마트한 사람들, 높은 기본 연봉.


기대치 않았던 것까지 덤으로 있다.

야근수당, 성과급.


밤새면서 일하고도 '포괄임금제'라는 이름으로 야근수당 한 번 못 받아봤던 내게는 신세계다.


나는 성골과 진골 세상에서 떠돌아다니는 경력직이다.

이직이 잦은 업계여서 그런지 경력직을 배척하는 문화는 없다. 다만, 경력직을 in-group에 끼워주지도 않는다.


아무리 경력직이 곳곳에 있다고 해도 신입공채로 입사한 임직원의 비율은 따라갈 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공채들만이 함께 쌓아온 동질감, 소속감,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 스며드는 것은 쉽지 않다.


인수한 회사 출신은 성골, 피인수된 회사 출신은 진골이다. 겉보기에는 출신성분과 무관하게 임원이 되는 듯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성골 세상이다.


경력직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다.


경력직으로서 느끼는 건 외로움도 있지만, 그건 잔잔한 이슈다. 그보다 큰 이슈는 나의 미래를 그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경력직은 회사 내에서 책임지고 이끌어 줄 만한 연줄이 없다.

저직급은 괜찮다. 승진을 거듭하면서 위에서 사람을 더 까다롭게 분별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이슈가 된다.


위로 올라갈수록, 또는 누군가에게 주요한 포지션을 맡겨야 할 때 대상자들이 좁혀지게 된다. 그럴수록 위에서는 한 명 한 명을 다각도로 들여다보는데, 그때 참고하는 여러 데이터 중 하나가 출신성분이다.


경력직은 조직에 대한 로열티부터 시작해 각종 의문점을 품고서 돋보기로 더 상세히 들여다본다.

경력직을 위로 올려야 한다고 머리를 싸매며 추가적인 노력을 들이고, 만에 하나 문제가 발생한다면 공채 출신을 올려놔도 받았을 질타에 추가적인 눈초리를 받는 리스크까지 껴안기보다는, 공채 출신을 올리는 게 군소리도 덜 나오고 안전한 길이다.


나는 대기업 생활은 오래 못 할 경력직 출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이 있다.


회사 생활 도중 경영진의 호감을 얻는 기회가 생겼다. 나는 그저 내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높은 임원의 눈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해당 임원은 내가 회사에서 더 돋보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 했고, 내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해당 임원과의 식사 자리에 참석하게 됐는데, 내게 이런저런 궁금증을 적극적으로 쏟아내셨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회사에서 근무한 기간, 연차에 대한 질문을 하시길래 '현 회사에 경력직으로 이직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내게 추가 질문을 하지 않으셨다.


그 순간은 내게 인상 깊게 남았다.

그리고 현 회사에서의 한계를 바로 체감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출신성분을 더 세세히 본다는 건 은연중에 알고 있었지만 그날의 사건을 계기로 현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는 건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속에 정해둔 시점이 있다.

현 회사에 언제까지 다닐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정해둔 기간이 있다. 그 이후의 대책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이 일을 한 지 1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있거나 잘 정리된 자료를 보면 설레는데, 일에 대한 설렘을 유지할 만큼의 환경이나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다 보니 많이 지쳤다.

게다가 조직에서 더 올라가려면 적당한 사회성과 정치적 역량을 갖춰야 하는데 나는 그러한 부분은 부족하다 보니 다른 삶을 꿈꿔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커리어는 그 정도 시점에서 마무리하고 제2의 삶을 추구하는 것도 생각 중이다.

카페에서 바리스타를 하거나 어딘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생활비만 벌고 사는 것도 옵션에 있다.


시간이 너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기에 조금씩 부업을 하든, 커리어 전환을 준비하든 뭐라도 준비를 시작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지닌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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