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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봄 Jun 26. 2021

흔들리며 가는 길

오늘도 잘 쓰겠습니다

 직장 다닐 때 내 삶은 쓴 약과도 같았다. 아플 때 먹는 약처럼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쓴맛 나는 하루를 삼키며 살았다. 더 나은 내일에는 좀 더 유능하고 인정받는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낮에는 일과 인간관계를 능숙하게 처리하고 저녁에는 부대끼는 감정 없이 편안하게 잠드는 하루하루를 꿈꾸었다. 성공과 실패를 기본 값으로 하는 테스트기가 마음속에 있다 보니 모든 사안과 사람들이 O와 X로 나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없는 기준을 나는 꽤 오래 붙잡고 살았다. 왜 ‘이 세상은 경쟁’이라는 가설에 빈틈없이 긍정하는 사람처럼 살았을까. 누군가의 성공은 어쩌다 잡게 된 우연으로 치부하고, 실패한 소식에는 재빠른 동정과 안도로 대응하는 동안 내 몸과 마음에는 피로와 억울함 같은 것이 먼지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믹스 커피로 시작해서 로그아웃으로 끝나는 직장 생활, 텔레비전과 소파와 침대에 머무는 퇴근 이후의 생활에 다른 언어와 다른 속도가 필요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그 이유를 명확하게 찾기보다 텔레비전으로, 쇼핑으로, 잠으로 빠져들었다. 예능 프로그램의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고, 비슷한 스타일의 물건을 연거푸 구입하고, 억지로 눈을 감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 힘든 감정이 옅어지길 바랐다. 왜 속상한 일이 일어났는지 따져보다가 그 “왜”가 “나여서”로 귀결될까봐 겁이 났다. 상대가 나빴을 수도 있고 시스템 잘못일 수 있었는데도 전체를 차분하게 되새겨 보지 못했다. 나빴던 상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시스템을 지적하며 모난 돌이 될 용기도 없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상황을 만든 나를 자책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못했을 때 나는 다시 책을 폈다. 남이 판단하는 말에 나를 내버려 둘 수 없었고 남의 인정에 휘둘리기도 싫었다. 마흔 중반의 싱글 직장인인 내가 아닌, 그냥 나, 본래의 나를 만나고 싶었다. 우연히 알게 된 대학부설 평생교육원 독서심리과정을 수강하면서, 1년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책 속에서 발견한 문장은 울컥하게도 했고 안도하게도 했다. 자유롭게 감정이 움직이는 동안 스스로에 대한 다정한 마음이 솟았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 용감해졌던 것 같다. 불안 뒤에 서 있었던 것은 대단하지 못할까봐 겁먹은 나란 걸 확인하고 나니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피하고 변명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과정을 마치며 자연스럽게 자책도 멈추게 되었다.    

   

 “새로운 방향키를 잡고 서게 되었습니다. 아직 두려움은 있지만 이제 제 앞으로 다른 시간들이 흘러 갈 것입니다. 평온한 삶이란 흔들리지 않는 삶이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여전히 흔들리며 가는 길이겠지만 더 이상 아픈 현실이 아니라 성장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수강후기로 썼던 글은 아직 나에게 유효하다. 4년이 지난 지금 이십년의 직장 생활을 접고 명퇴자가 되었으니 어쩌면 더 크게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출퇴근과 함께 사라진 옵션들에서 벗어난 나를 누군가는 불안한 중년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운동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천천히 말하고 재미를 유예하지 않으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하루를 살고 있다.      


 오늘은 2시 넘어 카페로 나와 글을 쓰고 있다.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옆자리와 앞자리가 부지런히 바뀐다. 외근 나온 듯한 회사원들이 잠시 앉았다 일어난 자리에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이 얘기하다 가고, 학생 몇 명이 노트북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가 하면, 방금 전까지는 중년 여인들의 수다가 한참 이어졌다. 여인들은 주식과 자녀들 근황과 드라마 스토리를 주고받다가 오늘 저녁 먹을 반찬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같은 반찬인데도 조금씩 다른 조리 방법을 서로 나누던 그녀들은 각자의 감자조림과 멸치볶음이 있는 세계로 떠나갔다. 


 카페 외부 등이 켜졌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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