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켐벨 신의 가면 시리즈를 읽고
신의 가면 시리즈 마지막 장을 덮고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가 떠올랐다. 조셉 켐벨이 이끄는대로 인간과 신, 삶과 죽음, 세계와 우주, 종교와 철학, 과학과 문학의 오래되고 깊은 골짜기들을 건너고 나서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내부, 그 안의 신성을 만나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보물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이 보물을 발견한 것은 ‘거친 모험’을 겪고 난 이후였다. 찾고자 하는 무엇이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더라도 나는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불확실한 삶에서 빛나는 보물을 찾아내는 순간을 나도 경험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나의 내부로 들어가려면 일단 외부 세계와 부딪치며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
외부 세계는 언제나 거대하고 폭력적이며 강했다. 원시시대 인간 희생 제의부터 중세 마녀사냥, 근대 식민주의와 지금의 신자본주의까지 개인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때는 없었다. 게다가 소셜미디어와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고부터 그 힘은 한층 가까워지고 치밀해졌다. 이웃집 사정은 몰라도 유명인의 일상은 훤히 알 수 있고 어떤 매뉴얼만 따르면 금방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이 펼쳐진다. 내가 꿈꾸기도 전에 지상낙원은 저곳이라고 명확하게 제시되고 효율적인 삶의 태도로 분발하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처럼 느낀다.
되돌아보면 공교육을 받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제도의 구미에 맞춰 살아가는 순서를 밟게 된다. 좋은 대학, 번듯한 직업, 스윗한 가정을 향해 너도나도 줄을 서고 만족스러운 소비를 목표로 삶이 움직인다. 나 역시 그 길에 서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왔다. 문제는 그 길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다.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으니 그 과정에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 되고 시간 낭비로 치부되어 무의미한 영역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지금도 가슴 설레게 하는 장면은 정해진 길에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박완서 소설을 처음 도서관에서 읽었을 때 속이 뻥 뚫리던 느낌, 야자를 마친 친구들이랑 팝송을 흥얼거리며 빗길을 걸었을 때 차가우면서도 기분 좋았던 시간, 일 년 과정 독서 모임을 끝내고 발표한 글을 문우들이 서로 조용히 들어준 순간 같은 것들. 길 바깥,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곳에서 삶의 새로운 결이 펼쳐지곤 했다. 무언가 충족되고 비로소 접속되는 기분. 외부의 질서에 반응하는 내가 아니라 본래의 나를 알게 된 느낌. 그것은 내부에서 울리는 소리, 무의미의 영역으로 밀려났던 것들이 외부 세계의 틈을 뚫고 보내온 신호 같았다.
하지만 그 신호들은 계속 무시되었다. 울림을 주는 것들은 금새 사라졌다. 인정받는 담당자에서 유능한 관리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쳐 나갔으니까. 잠시 내부와 연결된 감각은 외부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재료로 소진되었을 뿐 일상을 바꿔 놓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계획에 없던 이른 퇴직을 했고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삶의 흐름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새 바뀐 것이 있다면 예전엔 세계의 ‘규칙’에만 관심이 있었다가 이제는 세상 속 사람들의 ‘모습’에도 조금씩 눈길이 간다는 것 정도. 다양한 개인들이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서 서로 다른 삶의 장을 겪으며 살아내고 있고 상처받고 헛발질하는 게 나 혼자만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도.
상처와 헛발질은 모자람이 아니라 고유한 이야기가 된다고 신화는 말하고 있다. 몰리 블룸의 “Yes, because”의 말하기는 머리에 쓴 공포의 바퀴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인생의 모습이 어떻게 생겨 먹었든 일단 예스라고 수용하고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그저 나의 이야기로 포용할 수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외부 세계라도 그 이야기를 없애지 못할 것이다. 나도 몰리 블룸의 말하기를 시작하고 싶다. 직장인의 생활은 끝났지만 그래서 끝을 이야기할 수도, 새로운 헛발질을 시작해 볼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으로도 외부 세계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가 이야기로 생명을 구해낸 것처럼, 서로의 세헤라자드가 되어주는 건 어떨까. 운명에 대한 원망과 거부 대신, “Yes, because”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전달하며 서로의 세헤라자드가 될 수 있다면, 세상의 이정표에 덜 휘둘리며 자신만의 모험 끝에 각자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의 가면을 완독한 지금, 파르치팔의 동정심까지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특별한 자아가 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해방감을 느낀다. 신의 가면은 낡지 않았다. 우리가 만들어 나갈 이야기 속에서 계속 변해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