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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봄 Jul 05. 2023

푸카 사히브, 총을 쏘다

오늘도 잘 쓰겠습니다

* 조지오웰의 <버마시절>을 읽고


 조지오웰이 그려낸 버마시절 속 인물들은 그들의 거리낌 없는 단점들 때문에 마음 주기 힘들었지만, 능수능란하게 그 시대를 그려낸 작가의 필력에 끌려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중심인물 플로리는 결국 총을 쏘아 자살을 했다. 카우크타다 유럽인 클럽에서 유일하게 원주민과 교류하고 버마의 문화를 존중하며 받아들이는 듯 보였던 그였지만, 버마인 여자를 경멸한 결과로 발목이 잡혀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것이 우포킨의 계략이었던 것을 떠나, ‘영국 공기’를 가진 엘리자베스를 유일한 구원의 대상으로 삼은 그의 태도는, 버마에 섞여 그들을 받아들여야한다는 신념과는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었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말로 하는 존중이 아니라 “영국인들이 스스로를 도둑으로 선언하고 합법적으로 도적질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플로리는 “어리석고 술이나 처먹는 멍청한 돼지들! 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이곳은 대체 어떤 장소이고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라고 한탄했고 “이제 그들에게서 어떠한 정당성도 찾을 수가 없고, 결국 이 불쌍한 악마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들이며,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고 통찰하며 ‘혼자라는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을 호소한다. 


 그렇다면 그가 “답답하고 숨 막히는 세계”라고 말하는 식민지 버마를 넘어서는 곳은 어디일까? 안타깝게도, 플로리의 그곳은 “영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다, 사고의 자유가 있고, 하층 인종의 교화를 위해 푸카 사히브의 춤을 추도록 운명 짓지 않는 다정한 영국”이다.그러나 그 자유란 것은 ‘영국인 백인 나리(푸카 사히브)’로 살아가도록 통제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일 뿐, 플로리의 부자유함의 근본 원인을 만들어낸 제국주의의 뿌리가 바로 영국이란 것을 생각할 때, “불모의 세계에서 혼자 침묵을 지키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비밀스럽게 사는 것보다 딸꾹질 같은 헛소리를 해대는 머리 둔한 푸카 사히브가 되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라고 한 고백은, 피식민지뿐 아니라 제국주의를 수행한 나라의 거주민 역시 병들게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플로리의 이중성 – 버마에 익숙하고 그 문화를 누리면서도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베라스와미 앞에서조차 자신은 로마시민과 같다고 말하는 – 은 그를 외롭게 만들뿐이었고,영국으로 다시 건너갈 만큼의 – 스스로 문제를 타개할 – 용기와 패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그의 독백했던 것처럼, 과연 신은 자기 연민에 빠진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러한 플로리 앞에 등장한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신선한 기쁨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왔고(어떤 상황이었던지 간에), 젊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삶을 그리다 보면 “구원이 존재하며,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그리고 운명은 제각각으로 굴러가며 혼돈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녀는 플로리가 가진 지식인의 태도도, 책도, 추악한 모습도 싫어했다. 버마로 온 이유는 2년 동안 다녔던 여학교 기숙사 시절의 “멋있는 황금빛 세상”처럼 버마에서의 생활이 “진짜 부자가 되는 것만큼 좋은 일”이라는 확신으로 온 것이었기에, 플로리와의 관념에 빠진 대화는 어색함과 거리감만 만들 뿐이었다. 


 우포킨도 베라스와미도 결국 자신의 명성을 위해 대치했다.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린 우포킨도, 교양있는 대화를 원했던 베라스와미도 좋은 결말을 가져올 수 없었던 것은, “영국인처럼” 대접받고 싶어했던 그 한계 때문은 아니었을까. 


 플로리는 자살했다. 스스로 총을 겨누었다. 한밤중 심하게 짖는 개에게 “잔인하게” 총을 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베라스와미를 유럽인클럽에 추천하는 것이 시끄러운 충돌을 빚을까봐 용기를 내지 못하던 그, 버마에서 모든 감정을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내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꿈꾸던 그는, 엘리자베스와 결혼에 실패하자, 그럭저럭 지낼 무기력조차 사라져 죽음을 택하게 된다. 


 신은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위스키⦁하인⦁버마여자에서 벗어나 그의 외로움을 끝내줄 구원의 대상을 찾고자 했던 플로리는 죽었다. 그의 죽음 뒤로 자신의 꿈을 이룬 엘리자베스는 성공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버마의 공기 속에서, 갈등 없는 확신 속에서. 그렇게 버마시절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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