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구글 지도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긴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결론은 안 하는 걸로... 안 해도 될 것 같다.
걷다 보니 성당Cattedrale di Palermo 앱스apse 외관이 보인다. 앱스 양쪽에 우뚝 서있는 탑과 옥색 돔도 보인다. 어머, 내 스타일이야 라며 마음이 호들갑을 떨며 난리다.^^ 아랍 노르만 양식 성당이 이런 거구나... 12세기 착공된 후 완공 시점을 특정해 선언할 수 없을 만큼 공사기간이 길었지만 앱스를 포함한 동쪽면의 아랍-노르만 스타일 외관은 12세기에 완성됐다고 한다. 이후 돔도 추가되고 많이 바뀌었지만 앱스와 앱스 양쪽에 우뚝 솟은 두 탑은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단다.
예쁘다. 앱스apse의 형태와 무늬, 색의 조화가 완전 내 취향이다. 이슬람 고유의 기하학적 패턴의 붉은 바탕 위에 검은 현무암으로 수놓듯 아라베스크 무늬를 만들었다. 투박하고 동시에 섬세하다. 시칠리아에 Arab-Norman Palermo and the Cathedral Churches of Cefalù and Monreale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9개의 문화재가 있는데, 성당도 그중 하나다.
[성당 남쪽 (인터넷 사진. 공간감이 느껴져서 무허가로 빌려옴.) 파노라마나 광각 렌즈로 찍은 듯. 워낙 넓어 보통 찍어서는 이렇게 나오지 않더라... 왼쪽, 성당과 아치로 이어진 건물은 주교궁. 주교궁에 교구 박물관이 있다는데, 나중에 봐야지 하다 결국 보지 못했다.]
[남쪽 입구 위: 가운데 앉아있는 인물은 예수, 왼쪽은 수태고지를 하는 대천사 가브리엘, 오른쪽은 수태고지를 받는 마리아. 마리아 앞에 당시 읽고 있었다던 구약 성서와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 화분이 있다]
바로 입구가 있는 남쪽으로 가지 않고 성당을 한 바퀴 돌았다. 북쪽 외관은 다른 면에 비해 너무 신경을 안 썼다. 기둥으로 장식된 문이 하나 있기는 한데, 모르고 보면 성당 벽인 줄 알 수가 없을 것 같다. 성당의 북서쪽 모서리 맞은편에 노르만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다는 예배당과 로지아Cappella e Loggia dell'Incoronazione가 있다. 대관식 끝나고 모여든 군중에게 손을 흔들었다는 로지아는 보이는데 예배당 입구는 어디인지 모르겠다.
서쪽 입구는 또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양쪽에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종탑이 있고 맞은편 주교 궁과 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아치 위로 통행이 가능한 것 같은데, 통행이 주목적이라기보다는 양쪽 건물의 높은 벽을 지탱하기 위한 고딕식 해답 같다. 아무튼 주교 궁의 종탑과 더불어 그로테스크한 고딕의 느낌이 있다.
성당 출입구가 있는 남쪽에 넓은 광장이 있고, 광장 가장자리에 성인들의 조각상이 적당한 간격으로 서있다. 조각상과 조각상은 나지막한 울타리로 이어져 있다. 울타리가 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성당 광장에 울타리를 쳐놓은 건 처음 보는 광경인 것 같다. 어제 프레토리아 분수의 가치를 깎아먹던 울타리가 생각난다. 시칠리아는 울타리를 좋아해?
광장 중앙에는 팔레르모의 수호성인 산타 로잘리아의 조각상이 있다. 성당은 오랜 세월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단다. 서쪽 입구는 13-4세기 고딕 스타일로, 남쪽 입구는 15세기에 카탈루냐 고딕 스타일로 보수됐단다. 돔은 18세기말에 추가됐는데, 이로 인해 외관은 물론 내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돔을 못마땅해했다는 글을 여기저기서 읽었는데, 내 눈에는 돔이 그다지 이질적이거나 거슬려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이 모습이 팔레르모 성당의 원래 모습인 거다. 이 모습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긴다면 나도 마냥 환영하고 좋아할 수는 없을지도...
성당은 공짜인데 왕실 무덤과 지붕, 성물 보관소 및 지하묘지는 따로따로 입장료를 받는다. 그냥 한 번에 받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다. 공간을 조각조각 잘라 여기는 얼마, 저기는 얼마 하는 것이 왠지 씁쓸하다. 알고 보니 여기만 그런 건 아니었다. 대체로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려다 보기 민망할 정도로 단호하게 제지당하는 장면도 종종 목격했다. 물론 나는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 여행하며 먹는 것과 보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기에 웬만하면 자유이용권에 해당하는 표를 산다. 다 못 볼 때도 있고, 괜한 짓이었다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입장권도 음식처럼 모자라는 것보다는 남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성당 건축에 얽힌 이야기를 파보면 드라마가 따로 없다. 성당을 지었다는 월터Walter of the Mill 대주교(이탈리아어로는 Gualtiero Offamilio)는 영국 사람으로, 윌리엄(이탈리아 어로는 굴리에모Guglielmo) 2세의 가정교사였다. 윌리엄 2세가 왕위에 오른 후 월터는 이런 관계를 이용해 팔레르모 대주교가 되었다(1168년). 윌리엄 2세는 차츰 대주교의 영향력을 벗어나고 싶어 했고, 팔레르모에서 8km밖에 떨어지지 않은 몬레알레에 성당을 짓고(1170년 착공) 대주교좌로 지정해 버렸다(1183년). 이에 위기를 느낀 월터 대주교는 자신의 엄청난 자금 동원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팔레르모 성당을 짓게 했다. 원래 비잔틴 교회가 있던 자리였다. 이후 아랍 지배 시절 모스크로 용도 변경됐던 것을 다시 교회로 사용하고 있던 중이었다. 심지어 월터가 대주교가 된 다음 해(1169년)에 지진이 발생해 많이 파괴됐음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려 15년을. 그런데 왕이 지은 몬레알레 성당이 대주교좌로 지정되자 그다음 해인 1184년에 급히 자신의 대성당을 착공했던 거였다. 그리고 착공 1년 만에 급하게 승천된 성모마리아maria assunta에게 봉헌했지만(1185년), 1190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도 성당의 완공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지하 묘실 석관에 누워서는 보았을 수도... 묘지가 지하 묘실에 있다. ㅠㅠ
성당 내부의 첫인상은 약간 실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외관에 깃든 세월도 이질적 요소들의 묘한 조화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향, 무취의 계산적 바로크 장식 교회 같다. 감동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18세기에 복원작업을 하면서 장식을 많이 없앴고, 돔을 추가하느라 대대적인 변화가 불가피했단다.
우선 테라스를 보기로 했다. 남쪽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입구 왼쪽에 노르만 왕조의 묘실이 있고, 그곳을 통해 지붕 테라스로 올라간다. 테라스는 시간 별로 입장이 가능하다. 관람시간을 기다리며 노르만 왕들의 무덤, 즉 석관들을 돌아봤다. 로마시대 석관들도 있고 거대한 반암porphyry 석관들도 있다. 반암은 로마 황실에서만 썼다는 귀한 돌이라는데, 성당 입구 왼쪽 공간을 지배하며 분위기를 해친다는 느낌이 든다. 짙은 팥죽색 색깔도 돌에 어울리는 색은 아니다 싶다. 육중하기만 하고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각이라도 좀 새겨 넣지... 어쩌면 동산이 부동산 같아서 거부감이 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다 옮길 방법이 있겠지, 철마다 옮기는 가구도 아니고 네 일도 아닌데 네가 왜 그런 걱정을 하니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익숙해서 그러려니 하지만, 이런 시신 보존 방식도 별로이고,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공간을 누리겠다며 탐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 못마땅한지도 모르겠다. 어떤 업적을 남겼든 이런 방식의 매장을 앞으로도 영원히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루제로 2세는 체팔루 성당에 왕실의 무덤을 만들려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 두 개의 반암 석관을 마련해 두었는데, 체팔루 성당이 완공되지 않아 묻히지 못하고 팔레르모에 묻혔다. 그 관들은 체팔루에 계속 있었는데 외손자 페데리코 2세가 강탈하듯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루제로 2세가 자신의 관으려 쓰려던 것에는 페데리코 2세가 있고 다른 것에는 그의 아버지, 즉 루제로 2세의 사위인 헨리 6세가 잠들어 있다고 한다. 헨리 6세가 있는 관의 전 주인은 노르만 왕조의 왕 tancredi였는데, 적통은 아니라도 루제로 2세의 손자이자 헨리 6세의 정적이었단다. 헨리 6세는 정적의 관에서 잠들고 싶었을까? 세상에 관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당시 복수의 문법이다 싶다. 중세 교회 지하묘지에 왜 로마시대 석관이 그렇게 많을까 했었는데 그 의문이 이제 풀린다. 관을 리사이클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장례풍습이 아닌지... 죽음과 장례에 관한 한 생각이 진짜 다르구나 싶다. 신성함과 엄숙함에 대한 다른 생각... 남의 시신은 막 꺼내고 그러면서, 누군가에 의해 꺼내질 자신의 시신은 왜 그리 좋은 관에 잘 보존하려 애썼을까?
폐쇄공포증이 없거나 있다면 극복해야 닿을 수 있는 지붕 테라스 여행은 언제나처럼 보람 있다. 뻥 뚫린 하늘 아래 산을 배경으로 나지막이 자리 잡은 팔레르모 전경이 다 보인다. 마씨모 극장이 보이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이 몬테 펠레그리노라고 한다. 색다른 풍경과 색감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곳에 있으니 새삼 고개를 꺾어야 비로소 너른 하늘이 보이는 곳에 갇힌 듯 살고 있음이 자각된다.
[왼쪽: 원죄 없는 잉태; 가운데: Chapel of San Francesco di Paola. 최초로 목격한 시칠리아 바로크 스타일 대리석 상감 장식(marble intarsia 또는 inlay); 오른쪽: meridian line. Giuseppe piazzi라는 유명한 천문학자가 만든 것이라고 함.]
테라스에서 내려와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러 번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다지만 그래도 싹 다 갈아엎지는 못했다. 돌계단, 돌바닥, 성물 보관소 입구 등 보물 같은 구석들이 남아있다. 노르만 왕조의 묘실 말고 지하 묘지에는 중세 거물들의 무덤이 있다. 월터 대주교의 석관도 이곳에 있다. 로잘리아가 지키는 도시의 성당답게 그녀의 유해가 있는 예배당이 있고, 성당 곳곳을 시칠리아 예술가들이 작품이 장식하고 있다. 성물 보관소에는 화려한 성물들과 페데리코 2세의 부인 아라곤의 콘스탄스의 무덤에서 나온 아름다운 왕관이 있다. 성물들이 팔레르모 성당 이름값을 한다 싶을 만큼 품위 있고 화려하다.
P.S.
성물 보관소에서... 진귀한 성물이 즐비했다. 조급한 마음에 예술품에 대한 감상과 감사가 일어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휙휙 지나쳐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웠고, 충분히 감상할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사람들 눈앞에 이런 화려한 성물을 휘두르며 뭘 하자는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칠리아는 늘 외세의 지배를 당했고 수탈의 대상이었고 쓸모가 다하자 버려졌었다. 기독교는 정치 세력과 결탁하며 신의 뜻을 저버렸고 (개인적인 생각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이 그 증거다 싶었다.
나라는 사람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즐기고 웬만하면 어디에서든 아름다움을 찾는다. 남들이 별로 볼 것 없다 해도 혼자 좋아하고 예쁘다 하고 그런다. 그런데 대놓고 좋은 것, 빛나는 것, 예쁜 것들을 모아놓은 곳에서 어찌 무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순간 들었던 거다. 아름다움에도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시각적 아름다움에 홀려 그저 탐닉하는 나는 옳은가? 권력자들의 수탈의 증거 앞에서 마냥 기뻐할 일일까?
지배 세력이 이 땅에 남긴 문화라는 이름의 유산에 이끌려 이곳에 왔다. 그래도 현재 시칠리아의 가장 큰 산업이 관광이라니, 과거야 어떻든, 그것들이 어떤 계기로 탄생했고 어떻게 지금 내 눈앞에 있게 되었든, 있는 그대로 감상하고 감사하면 될 일 아닐까? 그들도 인류고 인류의 유산은 맞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서 쓰는 돈은 이것을 있게 하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이 기뻐할 만한 곳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팔레르모 성당은 팔레르모 같은 느낌이었다. 과거의 영광과 현재 쇠락의 흔적이 공존하고, 멋있지만 뭔가 부조화스럽고, 섬세하고 허술한. 조금 전까지도 그게 매력이야. 여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신나게 놀 수 있어하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에 빠질 줄... 생각도 마음도 널을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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