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다비드에게 아침 문안 차 일주일 넘게 계속 비라고 걱정을 늘어놓자, 시칠리아 날씨는 수시로 바뀐다며 날씨 앱을 보여주는데, 어느새 오늘 날씨가 맑음으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일정 보고... 오전에 몬레알레 성당을 보고 돌아와서 오후에 팔레르모 성당과 시장을 볼 생각이라고 하니, 시장은 오전에 가야 한단다. 카포 시장mercato del capo은 성당 가는 길에 있으니 카포 들러서 팔레르모 성당 보고, 발라로 시장Mercato di Ballarò에서 점심 먹고, 몬레알레에 다녀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카포 시장 가는 길에 거대한 ficus 나무가 있다. 어제 가리발디 정원에서 봤던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나무보다 많이 작을 것 같지 않다. 이곳이 따뜻하고 습한 지역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팔레르모 3대 전통시장으로 꼽히는 카포, 발라로, 부치리아. 카포는 카포지구에, 발라로는 알베르게리아 지구에, 부치리아는 로지아 지구에 있다. 모두 아랍 전통시장suk의 형태라고 한다. 아랍 지배시절에 형성되어 이어지고 있는 걸까 싶다. 천 년도 더 된 일이다.
손바닥만큼 남았던 운종가의 흔적 피맛골을 갈아엎고 고층 유리 빌딩을 세운 걸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도시의 심장 같은 곳에 초라해 보여도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을 남겨두었더라면... 오늘이 있게 한 과거를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더라면... 그 고층빌딩 몇 개 없으면 서울이 망하니?
카포 시장은 뽀르따 까리니porta carini에서부터 베아띠 빠올리 광장piazza beati paoli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뽀르따 까리니는 옛날 팔레르모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던 시절에 있던 세 북쪽 문 중에서 성벽을 허물 때 같이 사라지지 않고 유일하게 생존한 문이라고 한다. porta가 문이라는 뜻이다. 이틀 전 다비드가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고 언젠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 했었는데 기억이...^^ [원래는 10세기경에 만들어졌음. 18세기에 도시 이미지 개선을 위해 지금 모습으로 예쁘게(?) 리모델링한 거라고..]
포르타 까리니 근처에서부터 시장 분위기다. 문을 통과하니 양쪽 가게에서 골목 하늘을 가릴 듯 길게 차양을 내어 치고 그 아래 상품을 진열해 놓았다. 아랍 전통시장 형태라는데 쌓여있는 물건을 제외하고는 우리 전통시장 분위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진열된 물건을 보니 마냥 신이 난다. 형형색색 그립던 재료들이 모두 다 있다. 우리나라에는 없어서 그리웠던 것, 있어도 턱없이 비싸서 그리웠던 것... 신선한 과일과 채소, 허브, 향신료, 다양한 해산물, 각종 절임 류, 심지어 말로만 듣던 보타르가bottarga까지. 온갖 포장재로 규격화되어 일일이 싸여 있지 않아서 더욱 좋다. 무게를 달아서 또는 원하는 개수대로 판다. 가격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다 너무 싸다. 우리나라처럼 농수산물이 비싼 나라는 없는 것 같다. 이유를 물으면 이구동성 불합리한 유통구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의 유통과정에는 어떤 비법이 있길래 이렇게 싱싱하고 싼 걸까?
시장을 보니 이곳에서 살아 보고 싶다. 매일 장 봐서 밥만 해 먹고살아도 몇 달은 행복할 것 같다. 박물관에서는 며칠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시장에서는 몇 달이다.^^ 낯선 과일도 다 맛보고 싶고, 식재료도 사고 싶은 것이 태산 같다. 하지만 배낭 여행자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짐을 고스란히 어깨로 지고 다녀야 하는... 볼수록 안타까움이 커진다. 생과일주스 스탠드가 있다. 석류 세 개를 짜니 작은 컵으로 한 컵이 나온다. 서서 원샷하고 시장을 벗어났다.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 비상식량으로 산 모디카modica 산 초콜릿이 쇼핑의 전부다. 잘 참았다. [끝내 비상사태는 없었고 그 초콜릿은 한 달을 들고 다니다 결국 집에 와서 먹었다. ^^]
초콜릿을 사고 50유로짜리를 냈더니 주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물정 모르는 관광객에게 야박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돈을 받고 거슬러 주었지만, 뭔가 예사롭지 않다. 어제 심 카드 살 때 100유로를 냈더니 경기를 해서 잔돈으로 냈고, 박물관 매표소에서 50유로 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00유로는 그렇다 쳐도 50유로에도 경기를 하는 것이 이상하다. 이유가 뭘까?
[트라파니 산 소금, 보따르가, 앤쵸비. 소금이 비닐에 든 것을 보니 트라파니 산이 맞나 보다. 트라파니 사람에 의하면 종이상자에 담긴 것은 가짜란다. 종이상자는 습기로 망가져서 트라파니 소금은 종이상자로 포장하지 않는단다. 오른쪽 아래 소금에 절여진 멸치를 씻고, 뼈를 발라 병에 예쁘게 넣고 올리브 오일로 채운 것이 위에 있는 앤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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