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32일의 기록
잠시 기절했다 깼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다시 자야 하는데...
예약한 숙소에서 결제 문자가 왔다. 문자만으로는 누가 출금을 한 건지 모르겠다. 혹시나 하고 이메일을 확인하니, 안내 메시지가 있었고, booking.com 지불 상태도 정상이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취소 deadline이 며칠 더 남았는데 왜 벌써 결제를 했는지 의아하지만, 어차피 취소할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다.
그러고 나니 이미 결제한 숙소들이 더 있었는데 안내 메일이 없었다는 게 생각났다. booking.com의 지불 상태가 궁금해 확인해 보니 모두 미지불로 되어있다. 뭔가 꺼림칙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 와중에 잠은 더 멀리 달아났다. [나중에 한 곳은 이메일로 확인했고, 귀찮아 내버려 뒀던 다른 곳도 문제없었다. 끊임없이 의심했지만, 시칠리아는 의심했던 나를 늘 무안하게 만들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부터 일주일 넘게 계속 비다. 급 우울해진다. 방수 재킷도 있고 우산도 있고, 배낭 커버도 있고, 신발도 고어텍스이고... 비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것 같지만,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계속 싸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에 비라… 그것도 연속으로 일주일 넘게... 운을 비행기 좌석에 다 썼단 말인가???
의연하기로 한다. 좋은 것만 바라고 온 여행은 아니잖아. 사서 고생해 보고 싶었잖아. 사실 내 여행에는 늘 사서 고생하려는 저의가 깔려있다. 고생을 해봐야 사람이 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뼛속 깊이 새긴 건지 뭔지... comfort zone을 벗어나 당연한 생존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에 놓일 때... 약간 명상의 상태가 된다고 할까? 음... 그러니까 구를 때 나름 구르는 희열이 있다.^^
물을 많이 마셔 몸을 순환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낮에 못 마신 물을 계속 마시고 있다. 그러니 침실 밖에 있는 화장실이 많이 불편하다. 빨래도 걱정이다. 남는 수건으로 빨래의 물기를 최대한 제거해서 말리려 했었는데, 수건을 매일 갈아주지 않는단다. 벽에 붙어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3일에 한 번씩 갈아주고, 매일 바꾸고 싶으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데, 수건 교체 비용이 세탁 서비스 비용과 같다. 고무장갑까지 챙겨 왔는데 일단 빨아보자 하며 빨아 널었는데, 안 빤 것보다 나은 상태로 말라 줄까? 느리게 마른다고 의복 수급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데, 습하고 더운 날씨라 냄새라도 나면 큰일이다. 한번 나면 없애기 쉽지 않고 다른 빨래에도 옮는다. 여행 중인 상황이라면 버리고 새로 사는 편이 나을 수 있다. 그래서 에어컨을 못 끄고 서늘함을 견디고 있다. ^^
신나게 돌아다녔다, 어제.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안도감이 느껴진다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에 이미 만점을 줬다. 유럽의 다른 유명 관광지 보다 오히려 안전한 것 같다. 호시탐탐 내게서 뭔가를 가져갈 기회를 엿보며 들러붙는 것 같은 느낌이 1도 없다. 내 생애에 혼자 가볼 수 있을까 하던 곳에서, 그냥 무사하기만 해도 좋겠다라고 했던 곳에서 이런 자유를 느끼다니... 감격이고 감동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끝내 단순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흥분이 좀 가라앉고 나니, 너무 걱정했던 치안에 대한 염려가 비워진 자리를 다른 어둠이 채운다. 동경하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 그것만 보이지는 않겠구나 싶다. 영광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가 벌써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신난 무심한 여행자인 척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마음이 아플 수도, 화가 날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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