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의 목표가 생기다.

- 자폐성향을 가진 아이

제 1 장. 나, 인생이 바뀌다.

- 요리로 치료를 한다.



1. 삶의 목표가 생기다.

- 자폐성향을 가진 아이



나의 20대 초반은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그로 인한 어머니의 건강 악화,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는 생각만으로 지원하여 붙은 대학생활로 시작된다. 대학생활은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 여고생과 다를 바 없었다. 집안 일과 조카 돌보는 일로 4년이 흘렀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직장도 없는 나에게 맞선이란 게 들어 왔다. 우연찮게 맞선을 보게 되었고 결혼을 했다. 모르는 이들은 우리가 캠퍼스 커플인지 안다. 같은 대학과 같은 동아리 출신이라는 점이 모두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국가유공자 자녀라는 공통점도 있다. 88올림픽의 흐름에 발맞춰 무엇인가를 꼭 이루어야겠다는 특별한 꿈도 없이 전업 주부의 길을 걸어가게 됐다. 결혼 후 90년 5월, 첫 아이를 낳았다. 첫 아이와 함께 여러 역할에서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 생활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평탄하지 않게 이어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마음 편하게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죽고 싶은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했다.


우리 애는 엄청 순해. 먹고 자고 먹고 자기만 한다. 그리고 돌잔치 때 남겨진 주스병, 소주병, 맥주병을 가져다가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일렬로 세워놓고 놀았다. 「이 녀석이 천잰가 봐. 똑 같은 것 끼리 모아 났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상표별로 정확하게 분류를 하고 또 일렬로 세워놓았다. 여기에다 큰애가 특이한 게 또 있었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조간신문을 그 콩알만한 녀석이 뭘 안다고 유심히 들여다봤다.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니, 아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삼성, 대우, 금성 등의 대기업의 마크(상표)였다. 아이는 이 표딱지가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에만 집중하면서 좋아했다. 「진짜 천재 하나 난가 보네. 신문도 보고, 같은 모양도 알고.」 이때까지만 해도 마음속으로 흐뭇했다.


돌이 지났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용조용하기만 하던 큰애는 내가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귀에 이상이 있나 싶어서 13개월에 동네 이비인후과에 데리고 가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싱크대에 팔이 끼었는데도 울지도, 엄마를 부르지도 않았다. 「너 왜 그러고 있니? 끼였으면 엄마라고 불러야지.」 서서 오줌을 지리고 그냥 그 상태로 너무나 평온하게 있는 것을 보고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아이는 상처를 입으면 울면서 엄마 품에 안겨야 하지 않는가? 아이를 안을라치면 눈을 피하고 반사적으로 뒤집어졌다. 엄마인 나에게 매달리는 일도 없고 뭘 해달라는 징얼거림도 없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와 다르다는 생각이 떠오르다가 ‘설마, 아니야, 성장과정에 있는 일일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리면서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큰 아이가 24개월에 창원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남편의 발령으로 창원에 이사 왔을 때에는 젊은 엄마가 단독 주택을 통째로 빌려 산다는 게 주위의 또래 엄마들에게는 큰 부러움이었다. 동네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우리집을 놀이방처럼 드나들면서 자유롭게 놀았다. 창원에서의 생활은 또래를 키우는 아줌마들끼리 아이들 이야기로 한나절을 보내는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애들이 우리집에 오지 않았다, 아이가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부여잡고 울고 있어도 매몰차게 아이를 때리면서까지 끌고 집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00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그래 맞다. 잘 어울려 놀지 않고 혼자서 놀고, 말도 안하고 멍하게 있을 때도 있고」 아줌마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들이 소문처럼 번져 나갔다. 시장이라도 갈라치면 연세 드신 아줌마들이 걱정 담은 목소리로 나를 불러 새워놓고 ‘우짜노 우짜노 새댁’ 하면서 동정어린 위로를 한마디씩 던져 주었다. ‘괘안아질거다. 다 클라고 그런기다.’


생후 17개월, 이사 내려오기 전 세브란스 병원 소아과에 갔지만 ‘너무 어려서 모르겠다 너무 어려서 검사가 안된다’고 나중에 다시 오라고 했었는데, 24개월이 된 지금, 동네 사람들의 입소문대로 아이를 마냥 지켜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 그런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병이라면 치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5개월에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에 데리고 갔다.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내 눈에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진료실 앞에 있는 조기교육실의 아이들이 하나같이 우리 아이와 비슷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아이에게 큰 문제가 생겼구나 싶었다.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 예약 일을 기다리는 한 달동안 아이에 대한 육아일기를 적었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이 일기를 보고 하신 말씀은 「이 자료를 토대로 볼 때, 아이는 자폐성향을 보입니다. 그나마 일찍 오신 게 참 다행입니다, 다양한 검사를 받아 보시고. 좀 더 지켜보도록 합시다. 그렇지만 조기교육은 일찍 받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에 두 번 서울을 오가며 검사를 받았다. 너무 어린 탓에 제대로 검사가 이루어지 않은 것도 있었고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의사선생님은 이제 창원에서 조기교육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의사의 면담이 있는 날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진료실에서 돌아서는 나를 불러서 「만약 이 아이가 만 5세 전에 문장이 되는 말, 그러니까 엄마 밥 주세요, 엄마 배 아파요. 이런 문장이 되는 말을 하게 되면 희망적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교육 시키세요.」 라고 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뭐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냐? 어떤 일을 하시냐 고 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장애를 가진 자녀의 조기교육을 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만했다. 내 아이 만큼은 시간이 지나면 말 할 수 있겠지 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아이도 세상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눈 뜨면서 늦은 밤 눈 감을 때까지 똑같은 말을 수 백번, 수 천번을 반복에 반복을 하면 말하기 공부를 했다. 나는 저 만치 뛰어 가고 싶은데 아이는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은 한 두번 들은 말도 잘 기억해내서 곧잘 지껄이곤 했다. 내 아이는 보통의 아이들이 식은 죽 먹듯이 나이가 차면 저절로 다 습득하게 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내 아이가 말을 못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하늘이 노란색임을 알았다.


서울대병원 진단 이 후로 나는 아침에 두 눈을 뜨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큰애를 조금이라도 낫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회사원 아빠, 전업주부 엄마인 우리집의 경제력으로 아이에게 장애를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건강하게 자라면서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 다해줘도 모자랄 판에 장애는우리 가족 모두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며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나는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소아정신과 분야의 최고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찾아갔고,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유명 의사선생님에게도 매달려 아이의 진료를 부탁했다. 병원에서 일러 준대로 조기교육실을 찾았다. 1992년, 창원, 마산, 진해를 다 뒤져서 특수교육을 전공한 선생님을 찾았고 그 때 찾은 곳이 자람터이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밤 12시가 넘어도 조기교육실 원장님에게 전화을 걸어 상담을 요청했다. 조기교육실은 일주일에 세 번씩, 한번에 40분 수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1993년, 조기교육실 외에 마산에서 수녀님이 운영하는 장애-비장애 통합 어린이집에도 보냈다. 처음에는 거리가 멀어 수녀님의 어린이집 통학 버스가 창원까지 못 온다고 했다. 내가 통학하는 아이들 지킴이가 되기를 자처한 끝에 성모유치원에 보낼 수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작은애를 업고 큰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 버스를 탔다. 이와 함께 어린이집 보육교사처럼 아이들을 통솔해서 수녀선생님께 인수인계하는 통학 담당자가 되어야만 했다.


조기교육실, 통합유치원과 더불어 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라는 심정으로 새로운 환경을 자주 접하게 했다. 주변의 창원대학교와 경남 도청을 자주 찾았고, 볼거리로는 창원백화점과, 부림시장을 자주 갔다. 먹을거리가 많고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넘쳐나는 재래시장은 진기한 것들이 많이 눈과 귀를 자극하는 훌륭한 학습장이었다. 창원백화점 지하 소극장에서 인형극도 많이 보여주었다.


내가 아이에게 행한 자연학습법이 어떤 전문가로부터 이렇게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내 방법이 매우 현명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특수교육과 치료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게 되었을 때 헬렌켈러의 스승인 설리번 선생이 자연 속에서 물소리, 나무, 잔디, 흙, 새소리 등을 접하게 함으로써 최선의 교육을 제공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헬렌켈러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설리번의 헌신에 힘입어 정상인이나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헬렌켈러는 훗날 스승 설리번에 대해 회고하기를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린시절 내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얼굴 윤곽만 보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꼼꼼히 연구해서 나 같은 사람을 가르치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부드러운 동정심과 인내심으로 극복해낸 생생한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라고 하였다.


나의 희생이 내 아이에게도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바랬다. 그리고 희망의 불씨가 살아났다. 조기교육실은 생후 25개월에 시작하여 6.5세까지 다녔다. 서서히 인지 능력이 생겼고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을 실감했다. 조기교육실에서의 노력은 가정으로 연결되어 복습을 하였고, 반복되는 가르침은 기억을 해 내는 기적을 가져 왔다. 나와 아이가 기억할 수 있는 일은 저너머에 있어 꺼진 걸로 알았던 희망의 불씨가 조금씩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7세가 되었을 때 남편의 직장이동으로 다시 경기 광명시로 이사를 했다. 이 아이는 8세에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일반아이들과 똑같은 한경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중학교 때는 영화 감상평을 엮은 책을 내면서 걱정하고 염려 해 주신 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평범한 전업주부이자 자폐성향을 보이는 아이를 키우는 아줌마 도전의 시작은 다시 공부하는 것이었다. 자폐에 대해, 장애에 대해 무지한 나는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시작한 공부이다. 아이가 유치원에 간 사이에 도서관과 서점에서 책을 봐야 했고, 신문에 실린 내용을 찾아 보아야 했다. 아이로 인해 시작한 공부로 장애친구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후에 이것이 바탕이 되어 삶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었다. 첫 시작은 학습지 방문교사에서 시작하여 장애전담 어린이집 교사로 이어졌다. 복지관 치료사로 일하게 되면서 요리를 활용한 요리치료 프로그램을 만들기까지 이르렀다. 요리치료로 장애 친구와 부모님들 그리고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전국적으로 불러 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꼭 가야한다가 나와의 약속이다.


"선생님,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 한국요리치료연구소의 철학*

신나고 신기하고 신선한 요리치료는

대상자의 특성과욕구를 파악하고

장애인의 유형과 수준을 알고

방법을 알고 방향을 찾고 방식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활동합니다.


since2007한국요리치료연구소by권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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