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좀 본업을 잘하시면 안 되나요
그냥 자를 수 있는 만큼 더 잘라버리려고.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쉽게 넘기기엔 마음이 꽤 쓰리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곱씹고 싶지는 않다.
무거워진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얼굴로 마지막까지 내게 허리를 굽혀 거듭 사과했다. 불편하다. 더군다나 나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는 사람이라면 더욱 불편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난 그저 오랜만에 내 헤어 스타일을 바꾸고 싶었을 뿐인데.
그 미용실을 다시는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와서 본인에게 AS를 받으라고 한다.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한다. 대체 그 미용실을 내가 왜 또 가야 할까.
여기는 12호 써요? 14호 써요? 위에는 90도로 말아요? 내 머리에 롯드를 말던 스탭은 옆에 있는 디자이너에게 계속해서 물어본다. 내가 예약한 디자이너는 옆에 있는 다른 손님 머리를 자르며 답변을 준다.
셋팅 기계의 높은 열이 두피와 귀에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이전에도 셋팅펌을 여러 번 해봤지만 처음 겪는 뜨거운 경험이다. 당황한 내가 귀가 뜨겁다고 하자, 스탭은 당황했으면서 당황하지 않은 척 친절하게 묻는다.
"뜨거우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지금 어떠세요?"
차가운 바람으로 두피를 말리니 뭐가 계속 떨어진다. 옆에 있는 스탭은 그 떨어진 무언가를 줍고 드라이기로 말리고 또 떨어뜨리고 또 줍고 또 드라이기로 말리고 또 떨어뜨린다.
왜 나는 화상의 위험까지 감수하며 불안해하는 실험쥐가 되었을까. 미용실에서 이 정도는 그냥 감수해야 하는 건가. 그래도 결과물만 잘 나오면 괜찮겠지 뭐. 다들 배우면서 크는 거잖아. 하하하.
드디어 내 담당 디자이너가 등장했다. 컬 수정을 해준다며 열심히 머리를 만진다. 다른 데서는 이렇게까지 안 한단다. 컬이 예쁘게 나오도록 수작업으로 또 하는 거란다. 정말요? 감사해요. 나는 기분 좋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예쁘게만 나오면 다 괜찮으니까.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았다. 응? 뭐지? 아마 그 순간 모두가 이상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말한다. 일반 롯드펌 있죠, 그 아줌마들이 하는 알록달록한 거. 그건 물에 젖었을 때 제일 컬이 강한데 말릴수록 늘어져요. 그런데 셋팅펌은 머리를 말려야 컬이 나와요. 지금은 잘 안 보이죠? 물 때문에 중력 때문에 아래로 쳐지는 거예요. 아시겠죠? 자 머리를 말려볼까요. 이제 컬이 나옵니다.
"죄송합니다. 컬이..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꽁트찍나. 컬이 그냥 안 나온 수준이 아니라 이상한 모양으로 뻗쳤다. 물론 머리결도 상했다. 여러 개의 약을 바르고 여러 번 열을 쐬었으니 당연하지. 빗자루 수준으로 타지 않은 게 다행일 뿐이다.
앞에 있는 거울에 내 표정이 보인다. 벙찐 표정으로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하는 얼굴이다. 분명 방금까지는 기대감에 들떠 잔뜩 웃고 있었는데.
"...이유가 뭔가요?"
"죄송합니다.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모르겠습니다."
"네?"
억지로 둘러대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하나?
당연히 해당 건에 대해 돈은 받지 않았다. 클리닉, 복구펌 등으로 본인이 책임지고 AS해주겠다고 한다. 누굴 약 올리나? 어수선한 스탭들과 실력 없는 디자이너에게 내 머리를 또 어떻게 맡기라는 걸까. 거절했다. 나는 이곳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고 강하게 말했음에도 책임지고 복구해 줄 테니 다시 오라고 한다. 아니 가기 싫다니까?
무슨 책임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지겠다는 걸까. 나는 그 미용실 가격을 기준으로 클리닉과 복구펌 비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규정을 언급하며 절대 안 된다고 한다. 보상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본인 때문에 본인이 직접 망친 걸 복구하는 비용인데? 나를 설득하려는 시도 한번 없이 안된다고만 한다. 규정이라니 참 웃겨요. 규정이고 뭐고 말이 안 되는 건 당신이 망친 내 머리예요.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단단히 말하길래 피해를 직접입은 내 입장에서의 해결책을 제시할 줄 알았다.
그래. 어쩌다 문득 똥 밟았다 생각하자. 빨리 닦고 가던 길 가는 게 다음 할 일이지.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다. 그냥 내 돈으로 알아서 이 상황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죄송하다는 답장 하나 오지 않았다.
리뷰를 쓸까 고민했다. 망쳐버린 내 머리 사진 한 장만 올리면 별다른 언급 없이도 악의적인 리뷰가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내 히스토리에 더러운 똥이 묻어있는 느낌이라서, 그래서 그냥 스쳐가려고 한다. 이렇게 망친건 내가 처음이라니 다른 고객한테는 반드시 그러지 않길 바란다. 나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제발 좀 남의 머리를 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머리 망치는 미용사라니, 본인의 전문성에 대한 책임감을 제발 좀 갖추시길 바란다.
덕분에 무언가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았다. 이 미용실을 선택한 기준은 접근 편의성이었다. 그 주변에 약속이 있었고, 당일 아침에도 그 미용실에 남은 시간대가 있어 예약했다. 또한 결국 돈은 안 냈지만 생각보다 비용도 저렴해서 처음에 놀랬다.
과연 내 머리를 맡기는 곳을 고르는 기준이 편의성인 게 맞나? 아니지. 아니었다는 걸 다 망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차라리 동네에서 고를 때는 더 깐깐하게 이것저것 비교하며 선택했다. 하지만 이 미용실은 서울의 중심지에 있었고, 나도 모르게 당연히 그 정도 자리에서 장사하는 거면 다 잘하겠지 믿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안일한 마음으로 예약했다. 생각해 보면 동네에서도 인기 많고 잘하는 디자이너들은 며칠 전부터 예약이 꽉 차있다. 그런데 당일 아침까지 예약 자리가 비어있는 디자이너라니. 거기에 다시 기르면 그만인 커트도 아니고 펌을 맡기다니, 내가 왜 그랬을까. 심지어 나중에 찾아보니 주로 남자머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과연 그 점이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미리 알았다면 예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헤어 스타일은 사람의 외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외모가 다가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지금 그 말하는 게 아니잖아! 하고 받아칠 거다. 이렇게 중요한 헤어스타일을 그저 약속장소 주변에 남아있는 자리를 예약해 놓고 저렴한 가격에 알아서 잘 나오길 바랐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알아서 좋게 나왔다면 제일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니 문제다.
망친 머리 때문에 며칠 동안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뻣뻣해진 머릿결과 이상하게 잡힌 컬모양 덕분에 드라이도 잘 되지 않으면서 또 중화제 냄새는 꽤 오래 남아있었다. 잘못된 선택의 기준이 일으킬 수 있는 결과물, 아주 잘 봤습니다. 연말 선물 감사하고요. 앞으로 삶의 지양분으로 아주 꼭꼭 꽉꽉 꽥꽥 씹어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