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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tin Dec 26. 2023

꽃등심보다 밥버거가 맛있다

나에게 맛있는 음식이란...더보기


(썸네일로 쓰려고 오랜만에 밥버거 먹음)


정확한 가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1인분 가격임에도 꽤 비쌌다. 거절할 명분이 없어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이전까지 나에게 음식이란 행복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단어였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최고급 한우 투쁠 꽃등심을 먹으며 깨달았다. 맛있는 음식이 맛있으려면 관건은 음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날따라 유독 밥버거 생각이 났다. 이 고기 한 덩이면 밥버거를 몇 번이나 먹는 걸까. 두 달은 넘게 먹겠구나. 흠 근데 난 주로 3단 밥버거를 먹었으니 그 정도까지는 안 되겠네. 아 꽃등심 진짜 먹기 싫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다. 절규다.




대학교 주변에 필수적으로 있는 몇 가지 프랜차이즈 중 토스트 가게와 밥버거 가게가 빠질 수 없다. 저렴하고 맛있는데 하나만 먹어도 든든해지는 고마운 음식들. 아침 수업 전에, 공강일 때, 수업이 모두 끝났을 때 등 동기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가 참 많이도 먹었다. 부실하지 않냐고? 청춘의 열정을 비타민으로 자세한 영양 정보는 건너뛰겠어요.



특히 밥버거는 토스트가 가질 수 없는 환상의 페어링을 갖추고 있다. 바로 컵라면! 쌀과 면과 국물의 조합이라니!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나 정말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외치면서 강의실부터 가게까지 뛰어가 금세 컵라면 국물까지 싹 해치우던 우리들. 탄수화물과 나트륨으로 꽉 채운 가성비 넘치는 한 끼로 빠르게 푸근해진 모두의 뱃속. 나른한 얼굴로 이제 아메리카노 먹으러 또다시 출발.





그렇구나. 같이 밥 먹고 싶지 않은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맛있지 않구나. 내가 여태까지 음식을 좋아했던 이유는 음식에 있지 않았구나. 내게 그 꽃등심은 그저 고역이었다. 값비싼 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신 점은 감사하지만요, 뭐 어쩌겠어요. 저도 사람이든 뭐든 마냥 쉽게 싫어하지 않거든요.



그날의 깨달음은 나의 음식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맛있는 음식이란 무엇인가. 음식을 통한 행복은 무엇인가. 진정한 미식이란 무엇인가.



내가 여태까지 먹은 것들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지? 머릿속에 맴도는 여럿 후보들을 떠올려보니 '그 음식 이름' 하나만 낱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공강 때마다 다섯이 나란히 뛰어가서 먹은 밥버거집, 추운 겨울 아침부터 친구랑 줄 서서 먹은 돈까스, 속재료가 매우 과해 옆구리가 다 터져 숟가락으로 퍼먹은 엄마의 묵은지 참치김밥, 예약을 위한 L의 2달간의 노고가 담긴 생면 파스타 레스토랑, 내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친구가 사준 솔트크림라떼, 제주도에서 친구들과 끓여 먹은 제주 특산물 없는 부대찌개, 날씨 때문에 운행이 멈춘 케이블카 앞에서 절망하다가 옆에 걸린 광고판을 보고 택시 타고 달려가 문 닫기 직전 L과 둘이 간신히 먹은 여수 서대회 무침, 할아버지 할머니와 크리스마스 이브에 먹은 달달한 양념의 왕소갈비, 회사 다닐 때 그만 좀 먹자고 투덜거리면서도 점심으로 허순대씨와 주 2회는 먹었던 순대국밥 등등등등 마이크가 주어진다면 나의 아밀레이스(구 아밀라아제)에 의해 부식될 때까지 끝없이 말할 수 있다.



맛집 투어를 좋아하고 새롭고 다양한 음식을 좋아하는 만큼 꽤 맛있는 것들을 이것저것 먹어보며 살고 있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음식도 매우 좋아하고 평범하고 소박한 음식도 물론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는, 그 음식을 먹은 순간에는, 모두 구구절절 찰싹 붙어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모든 음식이 맛있지는 않다. 맛없는 음식은 누구와 먹어도 맛없다. 단지 맛없는 음식을 먹은 그 순간까지도 소소한 추억거리가 된다는 점. 거기 진짜 별로지 않았어? 그치? 아 거기 말고 내가 진짜 맛있는 데를 아는데 거길 가봐야 돼. 궁시렁 궁시렁 재잘재잘.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먹는 맛있는 음식은 절대 맛있을 수 없다. 즐겁지 않은 식사자리라면, 가격이든 품질이든 식재료 본질에서부터 아예 관심이 없다.






이로써 그날 먹은 꽃등심을 통해 드디어 완성된 나의 첫 번째 음식 철학, 나에게 있어 음식의 맛은 음식에 있지 않다.



어떤 냉철한 미식가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가소롭구나! 아직 네 녀석이 진짜 맛있는 음식을 못 먹어봤을 뿐이로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고작 그 정도의 경험치로 감히 미식을 운운하느냐! 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겠습니다. 더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기 위하여! 누구랑? 오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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