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부터 시작한 직장생활을 끝내고 어학연수를 가기까지.

by 색바람

2025년 2월 어느 날, 오랜 시간 다닌 광고대행사를 퇴사했다.

2014년부터 바이럴마케팅회사를 시작으로 미디어 랩사, 잠깐의 글로벌 한국지사를 거쳐 광고대행사까지 오랜 시간 광고업계에서 종사해 왔다. 사실, 중간중간 보람도 느끼고 재미도 느끼지 않았다면 이 단계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약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고, 그 안에 작고 소중한 즐거움과 기쁨도 있었기에 그동안의 직장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마치 최선을 다한 연애에 미련이 없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대행사에서 일을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회사를 나왔다.


광고대행사에서 5년 동안 일을 하면서 턱끝까지 숨이 찬 상태에서 레이싱을 이어가는 기분이었다. 캠페인을 진행할 때마다 좋은 성과를 냈고 그 안에서 보람도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다시 새로운 성과를 보여야 했고 잘하면 본전, 못하면 내 잘못이 되는 것이 전 세계 공통 직장인들의 애환 아닐까.

매일 변화하는 미디어 시장 속에서 팀장으로서 팀원들을 이끌어야 했고, 그 누구보다 불안했지만 불안한 티를 내서는 안 되는 위치였다. 그러다 보니 몸에서 먼저 그만하라고 소리를 외쳐댔다. 갑상선이 깨져 목을 만질 수도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고, 어깨 염증은 날로 심해져 지하철에서 누군가 내 팔을 살짝 건드리기라도 할 때에는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목과 허리 디스크는 현대인의 대부분이 그 고통을 알 것으로 이만 생략하겠다.


이 외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가기에는 아직은 내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그래도 쉬는 동안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고, 지난날들의 배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많은 세월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얻기도 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서른 네살이 되었고 백수가 되었다.

하지만 드디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영어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를 퇴사할 때 몇 개월 휴식기를 가지고 이직을 할까, 어학연수를 갈까 너무 고민을 많이 했다. 나이가 벌써 30대 중반을 향하고 있고, 지금 가장 중요한 시점에 회사이직을 포기하는 건 꽤 큰 기회비용을 놓치는 것 같았다. 퇴사일을 며칠 앞두고 계속 고민하던 와중에, 회사 대표님과 미팅을 하며 이미 내 마음에 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은 어학연수를 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분명 또 다른 벽을 만났을 때 내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핑계 삼아 합리화할 거라는 대표님의 말씀은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 가자.' 결정을 함과 동시에 갑자기 가슴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순간, 멈춰있던 나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매일 회사와 집을 오가며 의미 없이 흘러가던 시간이 내 손에 잡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러 유학원 상담을 받으며 세세한 계획들을 세웠다. 캐나다로 먼저 갈지, 필리핀에 먼저 가서 몇 개월간 집중하는 게 나을지 고민했는데 후자가 나을 것 같았다. 우선 2개월간 세부 어학원에서 세미스파르타 식으로 공부를 하고, 4개월간 캐나다를 갔다 올 생각이었다. 각 나라마다 유학원들을 상담하고, 어학원을 정하고 그간 미뤄왔던 운전면허도 따고 쉬기도 많이 쉬었다. 운전면허를 따면서도 학원에 비치는 얼굴들이 매우 앳돼서 혼자 흐뭇한 미소를 띠며 시험을 치기도 했다. 늦깎이 학생이 된 느낌이었는데, 그 느낌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운전을 워낙 무서워했던 터라 선생님의 가르침은 꽤나 열정적이었고, 그 열정의 산물들을 세세하게 적고 유튜브 영상을 몇 번씩이나 되돌려봤다. 나에게 재시험은 곧 퇴직금의 돈을 더 소진해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한 번에 합격했다.

이 작은 시험으로도 온몸이 긴장되고 떨려하는 내 모습을 보며, 10년 동안의 광고업계에서 일한 수고로움이 다시 한번 상기되었다. 이제 나한테 어울리는 옷을 입어보자 다짐하며 반짝반짝 빛을 내는 운전면허증을 몇 번이나 다시 꺼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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