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규 씨와의 인연은 5년 전으로 돌아간다. 페이스북 친구가 된 것이 2016년 5월이다. 그의 활동을 지켜보다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 2020년부터였다. 갑자기 사립학교 재단과 맞붙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싸움에 흔쾌히 응했던 그가 신기했다. 무섭지는 않았을까, 저러다 진짜 큰일 나는 건 아닌가.
싸움의 과정은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 기록됐다. 그야말로 공익제보자를 탄압하는 한국사회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하겠다. 이후에는 광주의 여러 사건·사고들을 전하는 소식통의 역할도 사실상 도맡아 했다. 그런 그가 더 궁금해졌다. 멀리서 응원만 하지 말고 직접 만나서 물어보자고 마음먹었다. 마침 새 책이 나온다고 해서 그에 맞춰 지난 12일 (무려!) 성남시 분당구까지 차를 끌고 올라와 준 그를 모처에서 만났다.
“글쓰기는 존재를 걸고 싸우기 위한 수단”
자기소개 간단하게 부탁드릴게요.
“저는 광주청년유니온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오마이뉴스에서는 작년부터 광주의 소식들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시민기자 김동규라고 합니다. 광주 지역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활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독자들에게는 ‘시민기자 김동규’로 더 익숙할 것 같아요. 시민기자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있을까요?
“제가 원래 활동가로 살다 보니까, 활동과 저널리즘이 겹치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뭔가를 알리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알리는 일에 좀 집중을 했던 것 같아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거나 현수막을 거는 등 여러 가지 방식을 최대한 사용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시민기자 활동도 그 일환이고요.”
동규 님 하면 역시 명진고 관련 보도를 빼먹을 수 없습니다. 사실 내부비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사례는 너무 많아서…. 두렵지는 않았나요.
“한국사회의 기본적인 정서가 ‘너만 조용히 있으면 돼’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반감이 저는 매우 큰 거 같아요. 그런 게 싫으니까 나는 시끄럽게 할 거야, 라는 식이죠. 사실은 두려웠던 순간이 없진 않았죠. 1억 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청구하는 서류가 와 있으니까…. 근데 전반적으로 저는 압박감이나 겁이 별로 없어요. 오히려 그런 두려움을 싸움의 원동력으로 삼곤 합니다.”
1심에서 원고인 명진고가 패소했는데, 이후 진행 상황을 알려주신다면.
“명진고가 이후 항소를 포기해서 결과가 확정됐습니다. 그 당시에 교육청에서 감사를 해보니 학생들에게 편성되어 있는 장학금 예산을 소송비용으로 사용했더라고요. 이게 문제가 되는 바람에 기사로도 나왔고요. 형사 4건, 민사 1건이 있었는데 모든 법적 분쟁에서 제가 결과적으로 이긴 것이죠.”
기사만 읽어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 많아 보였어요. 명진고가 왜 그런 식으로 대처했다고 생각하나요.
“사립학교법이 가지는 맹점이 너무 큰 것 같아요. 당시 교육청이 스쿨미투에 연루된 명진고 교사들에 대해 해임하라고 요청을 했는데, 학교는 이사회를 열어서 ‘해임은 심한 것 같으니 견책으로 합시다’ 이렇게 징계 수위를 낮춘 거예요. 문제가 이것 말고도 많았는데 혈연으로 구성된 이사회의 권력이 강하다 보니 실질적인 해결이 어려워요. 이런 것들을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 보니, 사립학교법이 개혁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진고 사건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청년의 금융 소외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청년금융소외시대’ 연재는 어떻게 해서 시작하게 됐나요?
“청년 금융에 대해 사회운동을 하는 ‘광주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가 결성되는 과정을 지켜봐왔던 터라 센터의 활동가들과 알고 지내고 있었어요. 이후에 그곳의 이사장님이 제 기사를 많이 보시다가 금융문제 때문에 센터에 오는 청년들의 사연을 전하는 기사를 저를 통해서 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센터가 3년 동안 천 명 정도의 청년을 만나서 상담을 해줬는데, 자신들의 경제 상태를 알려주면서 이렇게 힘들다고 말해준 기록들이 쌓여 있습니다. 이게 되게 값진 자료다 보니, 상담만 하면 아쉬우니까 상담 내용을 가공해서 기사로 써보자는 얘기가 나온 거죠.”
청년의 금융소외에 대해 연재해보니 어떻던가요.
“제가 지방 청년들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 무지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달까요?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고 살아가거나, 기본적인 정보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은 보통 정보를 주변 지인들을 통해 얻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불법 대출이나 사채에 쉽게 빠지게 되는 거죠. 이런 일이 그들 사이에 만연해 있어요. 주목받지 못하는 소외된 청년들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연재를 통해서 하게 됐습니다.”
동규 님에게는 ‘지역 청년’ 혹은 ‘광주 청년’이라는 정체성이 꽤 각별할 것 같아요.
“광주라는 정체성이 어린 시절에는 아픔이나 소외감을 줬던 것 같아요. 광주의 지역성이 되게 독특한 것 같은데, 5.18의 영향이 강하다고 봅니다. 어릴 때는 5월만 되면 도시 전체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음울한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처음에는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많이 느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5.18의 의미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광주항쟁 당시 5월 27일 전남도청을 지켰던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긍지, 죽을 줄 알면서도 거기에 있었던 이유에 대한 것들이요. 내가 없는 내일의 세상을 누군가가 더 낫게 만들 거라는 신뢰, 미래에 대한 낙관 이런 것들을 저는 그들로부터 배웠어요.”
동규 님에게 글쓰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활동의 일환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사회가 표현의 자유를 제대로 보장하고 있지 않다고 느꼈는데, 저는 이런 부당함을 참을 수 없는 성격인 것 같아요.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거죠. 존재를 걸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을 쓴다는 건 그 수단 중에 하나에요.”
이렇게 싸우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그가 해준 흥미로운 얘기가 있었다.
“저는 원래 강호의 숨은 고수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웃음).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조용히 역사의 그늘에 숨어서 관찰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근데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싸우는 삶을 살게 된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는 싸움꾼 체질... 이제는 숙명이라고 생각해”
정의당의 당원이기도 하잖아요. 광주에서 정의당 당적을 가지고 활동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광주는 더불어민주당의 힘이 굉장히 강한 지자체에요. 사실상 민주당이 독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30여 년 동안 세력 교체가 없다 보니, 후진적인 정치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의당 활동을 한다는 건 민주당 독점 구조를 깨기 위한 진보정치를 한다는 것이고, 시민들에게 새로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광주를 만드는 데에 정의당 광주광역시당이 노력하고 있어요.”
브런치를 통해 광주의 진보정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는 거로 아는데요, 단순히 정리만 하는 게 아니라 명과 암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진보정당 당원인 입장에서 직접 비판하는 것에 대해 신경이 쓰이진 않나요.
“많이 신경 쓰이긴 해요. 특히 같은 당 안에 활동하는 선배들에게도 아니꼽게 보일 수 있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이미 많이 써놔서… (웃음). 저는 지난날 광주의 진보정치를 주도해온 사람들이 시민들의 신뢰를 많이 잃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비판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실제로 그쪽에서 활동하던 지인이 제 글을 읽고 충격을 받은 뒤에 활동을 그만두고 나온 적이 있어요. 그만큼 진보정치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고 활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거죠. 그래서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국민의힘 신임 당 대표가 된 이준석 씨가 선거 과정에서 5.18의 의의를 강조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당장 몇 년 전만 해도 5.18 망언 때문에 시끄러웠잖아요? 이제는 5.18이 좀 더 주류적이고 당연한 일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어떤 정치세력이라도 인정할 수 있는 가치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다만 이전까지 5.18은 민주당을 비롯한 386 세대의 가치였어요.
그리고 실제로 정치적인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것도 민주당 386 정치인이었고요. 이제는 그들을 넘어서 소위 ‘수구세력’ 일부까지도 5.18에 대해 과거와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진보정당인 정의당은 민주당과 국민의힘과는 별개로 정의당의 방식대로 계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호남 할당제를 폐지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죠.
“정치적으로 좋은 전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호남 할당제를 한다는 건 당의 외연을 확장하고 호남 유권자의 지지를 받기 위함인 거라서, 지도부에 호남 인사를 의도적으로 배치해야 정치적인 진전이 있을 거라고 봐요. 굳이 그걸 폐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당내에서도 호남의 민심을 얻기 위한 시도를 여러 차례 했었는데, 할당제 폐지는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당세를 성장시키려면 장기적으로 볼 때 호남 할당제는 필요해요.”
동규 님은 국제연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광주에 관한 관심이 홍콩으로, 미얀마로 뻗어 나가야 할 이유는 뭐라고 보는지.
“5.18은 아픔과 고통에 응답한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1980년 5월 27일 이후는 세계가 광주의 아픔에 응답한 역사라고 볼 수 있어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독일로 가져간 광주 사진이 미국에 방송되었고, 독일과 미국, 일본의 교민들이 5.18 학살을 규탄하는 시위를 했던 것처럼요. 지난 40년 동안 전 세계적인 연대의 손길을 받아온 만큼, 우리도 이런 따뜻한 연대의식을 돌려줄 때가 된 거죠.”
그런데 일각에서는 마치 한국이 민주주의의 선배인 양 해외의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것이 시혜적이라는 비판도 있는데요.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는 비슷한 게 있다고 생각하고, 선배 그런 것보다는 동질감의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연대와 공감의 느낌을 광주에서 확장한 것에 가깝죠.”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느냐, 이런 질문도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놓칠 수 없는 꿈,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부당한 것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모든 억압에 대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명진고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에 쉬는 시간을 좀 가지고는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싸움꾼 체질인 것 같더라고요. 이제는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인터뷰집 <광주에서 활동가로 살아가기>를 지금 텀블벅에서 펀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떻게 해서 기획하게 됐나요?
“광주청년유니온 활동을 하면서 느낀 건데, 흥미를 유발하는 활동가들이 지역에 엄청 많더라고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사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분들의 목록을 적어보다가, 아예 찾아가서 인터뷰해볼까 생각에 시작된 기획입니다. 각자 나름의 영역에서 실력자들이고 인정받은 분들이라 인터뷰하면서 배운 점들이 많아요.”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이가 있다면.
“시민단체 ‘세금도둑 잡아라’의 이상석 사무총장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분이 19살 때 5.18이 일어났는데 광주시민들이 순천까지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걸 보고 사회운동을 시작했다고 해요. 이후에도 광주시장의 비리를 폭로하는 등의 싸움을 계속했어요. 최근에는 여러 사건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엄청 활발히 하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어요.
이곳저곳에 정보공개청구를 넣었는데 정보를 안 주면 고발하고, 정보를 주면 검토해서 고발하는 방식으로요(웃음). 별명이 불독이에요. 사실 정보공개를 거절당해서 행정소송을 하면 몇 년씩 소요되기 마련인데, 이분은 끈질기게 기다립니다. 이런 걸 30여 년을 한 거죠. 저라면 못했을 것 같아요.”
역으로 묻고 싶습니다. 광주에서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동규 님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무언가를 이어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5.18이건 뭐건 간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거든요. 누군가가 쉽게 죽지 않으며,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이랄까요. 제가 명진고랑 싸운 것도 결국엔 학교가 좀 더 좋은 곳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5.18 당시 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가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게 생각이 나는데, 지금, 이 순간 제가 몰두하고 있는 저의 싸움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또, 광주 정신이 무엇이냐 하면 ‘주먹밥 정신’이라고 하잖아요. 시민들이 서로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그 정신처럼 누군가가 고통받거나 죽어갈 때, 우리가 적어도 따뜻한 주먹밥 하나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느냐, 이런 질문도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놓칠 수 없는 꿈,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부당한 것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모든 억압에 대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명진고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에 쉬는 시간을 좀 가지고는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싸움꾼 체질인 것 같더라고요. 이제는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인생 계획이 궁금합니다. ‘전업 활동가’를 목표로 하는 건가요.
“사실 이미 활동이 전업이 된 상황이긴 한데, 지속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보니 이후에 노조나 시민단체에 들어갈 생각은 있습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어떤 형태로건 활동은 계속할 것 같고, 오마이뉴스 기사도 오래, 많이 쓰고 싶습니다. 결국, 뭐라도 기록을 지속적으로 쌓아두는 것이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