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사기캐인 이유

<우리들의 이순신> 전시회를 관람하고...

by 작가 조준영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이순신 장군 탄신 480주년 &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을 관람했다.
단돈 5천 원으로 전쟁 영웅 이순신이 직접 남긴 기록을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특히 국보인 <난중일기> 친필본이 전시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부터 노량해전이 벌어진 1598년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남겼다. 우리는 그 7년 동안의 기록을 <난중일기>라고 부른다.


전시장에는 <난중일기> 친필본 7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군의 일기에는 소소한 일상부터 나라에 대한 걱정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전장을 지휘하는 장수로서의 책임감과 고뇌, 어머니를 향한 효심, 그리고 주변 인물에 대한 평가와 감정까지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난중일기> 친필본


나는 이순신이 매일같이 일기를 작성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그는 전장에서 싸우는 무신이었지만, 단순한 군인을 넘어 문신의 역량도 갖춘 인물이었다고 느꼈다.


대표적인 예가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다. 이 작품은 당대의 문신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문학적 감수성과 표현력을 보여준다.


전시를 보며 나는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기록하고, 읽고, 설계하는 전략가형 지식인이었다.


그는 일기 속에 날씨, 지형, 부하들의 상태, 그리고 자신의 감정까지 세밀하게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 습관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상황을 분석하는 성찰적 태도, 즉 높은 메타인지 능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이순신은 책을 읽는 것을 즐겼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병법서를 통해 전술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학익진과 같은 지상 포위 전술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을 단순히 머릿속에만 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해전에서 적용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 결과가 바로 한산도 대첩에서 사용된 학익진 전술이었다.

현전하는 병서 중 가장 이른 시기의 학익진 그림이 실린 책


한산도 대첩은 단순한 전투 승리가 아니었다. 이 전투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이 막혔고, 왜군의 수륙병진 작전 역시 크게 흔들렸다. 만약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조선은 전쟁 초기에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시를 보며 왜 이순신의 전쟁을 ‘선승구전(先勝求戰)’, 즉 이겨 놓고 싸우는 전쟁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먼저 글과 생각으로 전쟁을 설계했다.

머리로 이긴 뒤, 마지막에 칼로 마무리했다.


류성룡 역시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치밀한 계획과 논리적 판단을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능력은 이순신이 전쟁 중 조정에 올린 보고서인 장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류성룡의 임진왜란 회고록 <징비록>


이순신의 보고서는 수치와 사실, 그리고 간결하고 명확한 논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의심이 많았던 당시 조선의 왕 선조조차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또한 그는 보고서에 공을 세운 부하들의 이름과 활약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부하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삶이 항상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선조의 의심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다. 특히 동료 장수였던 원균과의 갈등은 <난중일기>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순신은 원균의 부족한 인격과 도덕성, 공을 가로채서 허위 보고하는 습성, 그리고 전략적 무능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음이 <난중일기>에 기술되었다.

심지어 이순신은 원균과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조정에 편지를 보내 요청하기도 했다. 받아 드려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왕의 명령을 즉시 이행하지 않고 지체했다는 이유로 항명죄를 뒤집어 썼다.

그렇게 새롭게 임명된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사실상 궤멸시키는 참패를 당한다. 무려 160여척이 이 전투에서 침몰했다.


이후 선조는 자신의 결정을 뒤늦게 후회하며, 모친상을 치르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다.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결코 개인적인 감정이 아님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모친상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 선조의 '기복수직교서' 문서


그때 조선 수군에 남아 있던 배는 단 12척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합류시키라는 압박까지 가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에 반대하며 유명한 장계를 올린다. 수군의 육군 합병은 적이 원하는 바라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그리고 그는 20척 미만의 배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전시의 마지막 구역에는 노량해전 이야기가 있었다. 그곳까지 천천히 둘러본 뒤 전시실을 나왔다.

이렇게 가슴 뭉클한 전시를 마련해 준 노력에 작은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념품을 하나 샀다.

조선의 방패, 이순신 책갈피이다. 무려 15,000원이였지만

요즘 독서하면 이순신의 에너지를 받는 기분이다.


탁월한 전략형 문무신이자, 올바른 리더십과 공직 자세도 갖춘

정말 사기와도 같은 에너지를 말이다.



퇴근 후 틈틈이 부족한 시간을 모아 쓴 첫 종이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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