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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Jul 02. 2022

개국병 2개월째, 내 약국은 어디에?

제가 요즘 앓고 있는 병이 있는데요, 이름하여 '개국병'입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아이패드병'이 있는데 아이패드병은 아이패드를 사야만 치료가 된다고 하죠.(사실 저는 요즘 아이패드병도 같이 앓고 있는 중입니다..) 개국병도 치료법은 개국을 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이 병이 어떤 건지 아마 약사님들은 다들 아실 텐데요. 생소하신 분들을 위해 제가 잠깐 설명해드릴게요.


보통 약대를 졸업하고 나면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약국에서 근무 약사로 일하게 됩니다. 아, 물론 약사도 여러 가지 진로가 있어요. 대학원 진학, 병원 약사, 제약 회사, 공직 근무 등.. 하지만 오늘은 대부분의 약사들이 밟는 루트, 즉 저의 경험에 대해서만 이야기할게요.


사실 약사는 전문직인만큼 다른 직종에 비해 초봉이 높습니다. 특히 병원이나 제약 회사에 비해 약국 근무 약사가 월급이 많은 편이고, 대부분 개국을 생각하기 때문에 약국에서 일을 하게 되죠.


하지만 약국 근무 약사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보통 근무 약사를 쓰는 약국은 약국장님이 혼자 운영하기 힘들 정도로 바쁜 약국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도 처음 몇 년 동안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지식도 습득하고, 생전 처음 벌어보는 돈 맛도 느끼느라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후로도 기계처럼 조제하고 복약하는 생활에 시달리다 보면, 일은 익숙해지지만 휴식이 간절해지죠.


저의 개인적인 경험담을 하나 얘기해볼게요. 예전에 종합병원 문전 약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규모가 큰 편이라 직원이 6명, 근무 약사가 2명인 약국이었어요.


추석을 앞둔 어느 월요일, 원래 약국은 월요일이 바쁜 편인데 명절 특수 효과까지 더해져서 화장실 갈 틈도 없이 계속 일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는데도 계속 쌓여가는 처방전과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정말 이제 그만 오라고 문을 잠그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아마 약국장님은 생각이 다르셨겠지만..) 


그렇게 일을 하고 퇴근한 날은 거의 반송장인 상태로 집에 옵니다. 말 한마디 할 기운도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쓰러져서 자곤 했어요. 그 약국에서 몇 년을 일하다 보니 성인 여드름까지 생겼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여드름 고민은 안 했는데 말이죠. 열심히 번 돈을 피부과에 갖다주고 치료를 받으며 현타가 왔어요. 돈 벌면 뭐하나, 돈 벌어서 이렇게 피부과에 쓸 바에야 그냥 일을 그만두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보통 몸을 갈아 넣는다고 표현하죠. 문전 약국에서 일했던 날들이 그랬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일 자체는 익숙해지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오래 근무하기는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일의 강도는 높은데 연차도 없고 여름휴가도 보통 금토일 3일이 전부니까요.

 

그래서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미련 없이 그만두고 푹 쉬면서 한 달 정도 유럽 여행도 다녀왔어요. 그랬더니 아무리 치료를 받아도 안 없어지고 애를 먹이던 지긋지긋한 성인 여드름이 거짓말처럼 없어지더라고요. 놀라운 일이죠. 그때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문전 약국에서 근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실 근무 약사는 다른 직종에 비해 재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기 때문에 많은 약사들이 저처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힘들어질 때쯤 그만두고 휴식기를 가지는 거죠. 그때 여행도 다녀오고 충전을 하면서 다시 일할 체력을 기릅니다. 코로나가 오고 나서는 해외여행이 힘들어지기는 했지만요.  


이렇게 몇 사이클을 반복하다 보면 개국병이 찾아오는 시점이 옵니다. 약국 근무 약사는 경력이나 페이가 한계점에 도달하는 때가 있어요. 처음에는 경력이 쌓이면서 이직할 때마다 페이도 조금씩 올라가지만, 어느 순간 연차가 올라가도 페이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죠. 쉽게 말해 근무 약사로 벌 수 있는 소득에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이때쯤 개국을 생각하죠. 어느 정도 경험도 쌓였고 모아둔 돈도 조금 있으니까요.


'더 이상 남의 눈치 안 보고 내 약국을 하고 싶다. 남의 일 말고 내 일을 하고 싶다. 나도 국장님 소리 듣고 싶다. 내가 일한 만큼 벌고 싶다.'


개국병 초기에 하는 생각입니다. 보통 30대 초반쯤 이렇게 개국병이 오는 경우가 많아요. 남자 약사님들이 좀 더 빨리 걸리는 경향이 있고요. 저는 조금 늦은 편이죠.


내 약국, 나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건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지만 거기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골치 아픈 문제들도 있기 때문에 솔직히 귀찮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몇 년째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그냥 편하게 살고 싶어서 개국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를 못 들은 척 외면했습니다.


근무 약사로 일하는 것과 개국을 한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거든요. 쉽게 말해 근무 약사는 그냥 자기가 맡은 일만 제대로 하면 되는 일종의 회사원 같은 개념입니다. 하지만 개국은 사업, 자영업이기 때문에 그냥 약사로서의 일만 잘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국병이 찾아오면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힘듭니다. 근무 약사로 다시 일하기가 싫거든요. 물론 생활비가 떨어져서 꼭 일을 해야 되는 상황이 오면 일단 일은 하겠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개국병 앓이'를 합니다. 개국병은 개국하기 전에는 완치가 안되니까요.


그런데 예전에 개국 생각이 없을 때는 가끔 한 두 개씩 약국 자리 소개도 들어왔는데, 막상 하려고 마음을 먹으니 백방으로 찾아봐도 없네요. 요즘은 길을 가면서도 병원은 있는데 약국은 없는 자리가 있는지 살피게 됩니다. 집에서도 폰을 붙잡고 로드뷰를 돌려보며 약국 할만한 자리가 없는지 눈이 빠지게 찾아보고요. 물론 약국 매물 사이트도 뒤져보고 있습니다. 네, 개국병에 걸리면 이렇게 됩니다. 요즘 매일같이 이러고 있어요.


개국병이 심해지면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아닌데, 싶은 자리인데도 덜컥 계약을 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무서운 병이죠. 부디 그러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찾아보고 있습니다.


휴... 개국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저는 사실 그냥 때가 되면 누가 소개를 해주거나 좋은 기회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제 약국을 할 수 있을 거라생각했어요.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찾아야 될 줄은 몰랐습니다. 현실을 전혀 모르는 낭만적인 생각이었죠. 사실 그래 봐야 고작 개국병 2개월째라서 어디 가서 힘들다고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지만요.


그나마 네이버 카페에서 다른 약사님들의 경험담을 읽으며 나만 이런 건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요즘은 먼저 개국한 동기들과 선배들이 부러우면서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지네요. 다들 어떻게 알아서 자리를 잡은 건지..


저도 과연 이번 생에 개국을 할 수 있을지 앞으로 열심히 찾아보면서 글도 써보겠습니다. 부디 이 매거진의 끝은 제 약국을 오픈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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