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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l 16. 2021

야근하라고 강요하시면 안 되죠

세상에는 착한 사람은 있어도, 착한 관리자는 없다

'예견된 사고였다'


몇 달 전에 처리가 됐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개발을 해야 할 담당자는 새롭게 합류한 직원이었고, 업무가 익숙지 않은 개발자에게 우선순위 없이 일들이 던져졌다. 업무 능력은 둘째 치고, 중심을 잡고 업무를 할당해야 할 관리자가 부재였다. 정확히는 관리자는 있었지만 업무에 대한 교통정리나 우선순위 부여 없이 '그냥' 모두 중요하다는 주먹구구 식의 업무 폭탄이 던져졌다. 실질적으로 그 일을 해야 할 개발 담당은 그 직원뿐이었므로 업무 분장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는 그냥 '꽥' 하는 잠깐의 죽는소리 후에 그냥 지시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그의 능력치를 내가 평가하기에는 업무가 전혀 달라 무어라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늦어진 업무 처리로 이미 마무리가 되었어야 할 업무가 제 날짜에 처리가 안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를 무조건 몰아세우기에는 그의 상황도 이해가 되었고, 업무 처리를 다그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그 직원도 나름의 고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업무 인수인계도 없이 업무에 바로 투입된 것도 힘들 텐데, 제대로 마무리되는 일도 없어서 입사 후 밤낮으로 하는 마음고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닐 것이다.  처리가 안 되는 그 직원보다는 일을 그렇게 할당한 관리자의 무책임하고, 무리한 업무 지시를 마음으로만 탓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렇게 하나, 둘 쌓인 업무는 눈덩이가 되어 내게도 피로감을 안기기 시작했다. 다른 프로젝트 때문에 3주가 넘는 시간을 정신없이 보내던 어느 날 내게 날아든 관리자의 메일 한 통이 결국 쌓여있던 감정이 한 번에 폭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내일, 모레까지 개발 완료가 가능하도록 지원해 주세요'


다른 중요 프로젝트만으로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마당에 관리자의 메일은 불난 내 가슴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개발 지원  업무는 애초에 내 업무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처리할 업무에 집중해서 온 힘을 쏟아도 부족할 판에 시간적 여유도 없이 일을 던진 것에 난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한 번에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어떻게 합니까"

 "무조건 해야 해요 김 장"

 "아니, 그냥 몰아붙인다고 뚝딱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시간도 부족하고, 제겐 지금 그런 여유도 없다고요"

 "시간이 부족하면, 야근이나 특근을 해서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얘기까지 얌전히 듣던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냥 선을 넘어버렸다.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지만 배려와 이해와는 담을 쌓고 내뱉는 관리자의 말에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 버렸다.


'아니, 님이 제게 지금 야근하라고 지시하는 겁니까? 야근 강요하시면 안 되죠. 그리고 제겐 쉬지 않고  여덟, 아홉 시간 정신없이 일하는 게 한계라고요. 그렇게 일하고 나면 더는 몸이 버티지 못합니다'


결국 내게 지시했던 업무는 다른 부서원에게 넘어갔고, 그날의 설전은 내 패만 까놓은 좋지 않은 모양새로 일단락되고 말았다. 시원함과 청량감이 없는 찝찝한 뒤끝만 남긴 채. 그렇게 지시한 업무에 대한 불만을 공식적으로 터트린 후 내게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계속해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이나 경험했던 관리자와의 불화에 대한 경험이 그런 날 불안감에 가뒀다. 게다가 갑자기 내가 하던 업무를 떠안은 직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그런 벼락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도 업무 스케줄이 있을 테고, 반나절이 걸릴지, 하루가 걸릴지 가늠이 되지 않은 일을 끼워넣기하듯이 우선순위를 올려서 선 처리하도록 업무 지시를 받았으니 혼돈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하루 뒤에 다시 내가 그 업무를 맡아서 마무리했지만 본인과 관련 없는 업무로 하루 동안 마음고생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관리자는 그런 내 성향을 알고서 미리 그렇게 판을 짰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동안 관리자와 난 서먹한 감정을 표면적으로 드러내 놓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예전만은 못하게 일상을 보냈다. 오며 가며 대화를 편히 툭툭하던 사이였지만 주고받을 일이 애초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그냥 그렇게 대면 대면하게 시간을 보냈다. 중요한 일이나, 사건이 아니면 특별히 찾아가서 보고를 하지도 않았고, 가끔 하던 티 타임조차 갖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의 독촉은 없었지만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업무 담당인 내가 될게 뻔했다. 결국 업무 조정은 없었고, 진행하던 업무도 우선순위를 따져가며 꾸역꾸역 결국은 마무리를 지었다. 불편함을 감수하기에는 자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가 필요한 관계이고, 결국 중요한 의사 결정은 관리자가 해야 했기 때문에 당장은 절을 떠날 생각이 없는 내게는 선택할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하지 않았다.


결국 난 스스로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예전같이 관리자와 지내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고, 관리자 또한 기다렸는지 그간의 일에 대해 묵인하고 넘어가는 듯 보였다. 난 제대로 불평한다고 했으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돼버렸고, 부당한 업무 지시에 항변했으나 결국은 백기를 든 꼴이 되었다. 이런 일은 경험을 한다고 배워지지 않나 보다.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도 않고, 과거의 경험을 답습해가는 걸 보면 배운다고 다 습득이 되는 건 아닌 듯싶다.

그래도 한 가지 새롭게 배운 게 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은 있어도, 착한 관리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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