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적당히가 중요하다고 느껴진 어느 날

by 추억바라기

"아빠. 아빠~, 오징어 게임 봤지?"


전 직장을 퇴사하고 남는 시간에 여러 가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거리로 산책도 다니고, 미뤄왔던 책도 좀 보고, 혼자 여행도 다녀왔다. 그렇게 평소에 미뤄왔던 혹은 쉽게 해보지 못해 본 것 중에 하나가 넷플릭스 드라마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드라마 본방 사수를 자주 하는 나여서 아내는 넷플릭스 드라마까지 찾아보는걸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만 원도 안 되는 유료결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영화도 아닌 시리즈물이 대부분 인기 콘텐츠인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시간이 늘 문제였고, 아내의 윤허(允許)를 제외하더라도 그 긴 시간을 회사를 다니며 빼기란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기회라는 건 우연하게 찾아온다고 했던가. 퇴사 결정을 하고 일을 쉬는 2주간의 시간을 계획하고 있을 때 동생과 조카가 며칠 집에 머물다 갔다. 정말 우연히도 넷플릭스에 보고 싶은 콘텐츠 얘기를 꺼냈다가 동생이 사용하는 아이디를 알려줬다. 어차피 하나의 아이디 결제로 네 명이 사용 가능하니 추가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가장 현실 타협이 어려웠던 시간문제까지 퇴사 후 2주간의 반강제(?)적 휴일로 해결되었으니 남은 건 아내의 윤허만 남았다. 게다가 넷플릭스에서 보려는 콘텐츠의 시청 등급이 높은 관계로 딸아이와 함께 시청이 어려웠는데 때마침 온라인 수업 주간이 아닌 학교를 가는 주간이라 모든 상황이 딱 들어맞았다.

그렇게 난 넷플릭스에 사용할 개인 닉네임을 만들고 내가 보려던 콘텐츠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틀간의 넷플릭스 몰아보기가 시작되었고, 그 시작은 킹덤이었다. 워낙 예전부터 좀비물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김은희 작가의 극본이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시청 등급이 청불인 관계로 딸아이가 온라인 수업 주간이었으면 내게 이런 호사는 언감생심이었다. 마지막 관문인 아내의 묵인은 생각보다 오히려 쉽게 해결됐다. 아내의 텃밭 모임에서 소외계층을 돕는 일환으로 된장 만들기 행사가 있었고, 아내는 이 행사 때문에 이틀 동안 늦은 오후까지 집을 비웠다. 덕분에 그중 하루는 오전부터 딸아이가 오는 시간까지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고, 그렇게 시작한 킹덤 시즌1은 다음날 자연스럽게 아내와 함께 시즌 2를 보는 호기를 부렸고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잠시뿐이었고 어느새 아신전까지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게 찾아보려고 했던 넷플릭스 콘텐츠는 삼일 만에 모두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구미가 당기는 콘텐츠들이 넘쳐났고, 결정적으로 요즘 가장 핫한 오징어 게임이라는 시리즈가 떡하니 인기 순위에 올라와 있어서 넷플릭스를 시청하려고 들어갈 때마다 자신을 시청하라고 홍보를 대놓고 하고 있었다. 꾸역꾸역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내가 마지막 고비를 참지 못했던 건 오징어 게임을 시청한 전 세계 가구수(1억 3천만 가구)와 연예정보 프로에서 방문한 한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사람들에게 오징어 게임을 아느냐는 질문에 하나같이 모두 재미있게 시청했다는 답변들 일색이었다. 모두 나보다 나이 때가 있는 형님, 누님, 이모님들인데 그들도 본 오징어 게임을 아직까지 안 본 것이 왠지 시대 흐름에 뒤쳐지거나 트렌드를 무시하는 것 같은 소외감이 들었다. 결국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한 방으로 난 오징어 게임까지 시리즈를 마무리지었다. 물론 그 또한 딸아이가 학교 가는 주간이라 가능했다. 이틀에 걸쳐서 연속으로 들여다보며 넷플릭스의 깊은 늪에 빠져들었다. 아니 이미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렇게 이틀을 TV 앞에 매달려 시간을 더 보내고 나니 내게 남은 휴일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고, 재밌게 보긴 했지만 조금은 비생산적 시간 소비에 후회가 몰려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남은 휴일 중에는 넷플릭스 접속을 더 이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곳은 잠시만 방심하면 어느새 새로운 콘텐츠의 홍수에 휩쓸려 시청하고, 찾고 그리고 다시 시청하는 말 그대로 무한 콘텐츠 반복의 늪 같은 곳이 되겠다 싶었다. 조금은 아쉽지만 이번 퇴사 후 휴일로 주어진 남은 며칠 동안은 더 이상 거들떠도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깊이 드는 하루였다.


살면서 즐거움을 찾는 건 대부분 사람의 본성이다. 즐거움을 주는 행위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고, 사람마다 즐거움의 가치 기준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하며 즐거움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을 느낀다. 난 여행을 하며 많은 즐거움을 느끼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도 즐거움을 느낀다. 이런 즐거움은 살면서 힘이 들 때는 비타민 같이 심신의 피로를 회복해줄 때도 있고, 슬플 때는 잠깐이라도 슬픔을 잊게 해주는 기억 상실의 효과나 효능을 발휘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에도 중독성이 있는 아픈 즐거움도 있다. 잠깐의 즐거움을 쫓다 보면 많은걸 지불해야 하는 그런 나쁜 즐거움 말이다. 건강을 해치는 술, 담배도 있지만 정신을 피폐하게 할 수 있는 게임 등도 자주 하면 나쁜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잠깐은 스트레스 해소나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일들은 적당히가 중요하다. 적당히 즐기는 선에서 이런 즐거움도 찾고, 즐기면 우리의 정신 건강과 관계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난 아쉽지만 넷플릭스를 당분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당장은 눈도 즐겁고, 시청하는 시간 동안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즐기다 보니 빠져들고, 빠져들다 보니 절제가 되지 않을 듯싶어서 지금까지 즐긴 콘텐츠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기로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또 한 번 이런저런 콘텐츠가 쌓이고 쌓여서 꼭 보고 싶은 시리즈가 생길 때까지 꾹 자제력을 갖고 참아야겠다. 오늘도 TV 리모컨을 조정하다 잠깐이지만 넷플릭스 채널 접속 메뉴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이내 다시 채널을 올리며 그 콘텐츠의 홍수에서 냉큼 발을 뺐다.



며칠 전 갑자기 딸아이가 내게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함께 상냥한 듯 하지만 명백히 떠보려는 말투로 내게 물어왔다.


"아빠~, 오징어 게임 봤지? 내용 얘기하는데 다 본 사람 같은데"

"아, 아냐 딸. 나 얼마 전에 너튜브에서 '좀비 꽃이 피었습니다' 본 거 얘기한 거야"

최대한 시침을 떼고 무심하게 딸아이에게 말한 변명에 조금은 어이없는 제목이 붙은 걸 깨닫고는 세상에 비밀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깨달으며 다시 한번 입조심, 말조심을 하자고 다짐해 본다. 사실 딸아이는 'D.P.', '마이 네임' 등 보고 싶은 콘텐츠가 넷플릭스에 넘쳐난다고 늘 우리 집에서는 왜 넷플릭스를 보지 않냐는 불만을 제기하는 일인이다. 앞으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넘겨짚는 말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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