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2주 전부터 설렘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비행 왕복권을 끊을 때부터 마음은 이미 제주도로 날고 있었다. 이틀간 내 마음을 벅차게 할 올레 코스를 선택하기 위해 접속한 올레 공식 사이트를 들여다볼 때면 마음은 이미 길 위에 있었다. 그리 외롭지도 않고, 올레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길 위에 섰다.
2년 만에 찾은 올레다. 오랜만에 찾은 길인데도 낯설지가 않다.
이른 시간에 공항을 찾아 도착했지만 길의 출발점으로 이동해서 길의 출발점 위에 섰더니 시계는 이미 9시를 훌쩍 넘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내가 찾은 첫날 올레는 올레를 찾았던 여행자들에게 두 번째로 인기가 많은 10코스다.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에서 시작해서 하모 체육공원 종점에 이르는 15.6Km의 길이다.
산방산을 정면에 보고 걷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깎아지른 절경은 옆에 와있다. 올려다보면 그 절경의 시작과 끝이 모두 보일 때쯤 어느새 길은 해안길을 열었다. 끊임없이 눈으로 풍경을 좇으며 머릿속은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됐다.
평일에 이른 시간이라 길을 찾는 여행자가 많지 않아서 길 위에 서있는 사람이라고는 나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계단을 오르고 내려 한참을 걷다 보면 바뀐 풍경이 나를 보며 먼저 반긴다. 아침 일찍 기세 좋았던 산방산은 조금씩 이별을 고하며 시선 멀리멀리 멀어져 갔다.
아름답게 펼쳐진 사계 해변의 모습은 지쳤던 일상에서 벗어났음을 비로소 깨닫게 해 줬고, 먼발치 시선을 끄는 해안절경은 평범함을 거부한 힙한 모습을 보이며 조금은 허세까지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도 싫지 않고, 반가운 건 올레는 2년 만에 찾은 내게 손을 내밀고, 웃어주는 친구였다. 어서 오라고. 왜 이제야 왔냐고.
송악산을 오르기 전 남아있는 길 위에는 내 뱃속 허기를 채울 곳이 없을 것 같아서 길 위에 보이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시원한 맥주 한잔과 얼큰한 해물라면으로 제주의 첫맛을 감상하고 나서야 허기졌던 배와 10월의 뜨거운 햇살의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아득히 보이는 산방산이 마치 지나왔던 길지 않았던 시간만큼이나 멀어져 가있는 듯 보인다. 흘렸던 땀에 젖어있던 옷이 마를 때쯤 잠깐의 꿀맛 같은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길 위로 나섰다.
배를 채우고 나니 아침에 반갑기만 하고, 낯설었던 풍경도 어느새 부쩍 더 가깝게 느껴진다. 점심 식사 후에 펼쳐진 곳은 송악산이라는 관광지이다. 한산했던 제주 올레길에 종종 지나가는 유명 여행지들 중 하나다. 그래서 그런지 송악산은 입구부터 사람들이 붐볐다. 100미터 밖에 되지 않는 완만한 산이라 둘레길을 산책하며 해안 절경을 산책하기가 덧없이 좋은 코스였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올라섰더니 걸어왔던 길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등 뒤로 보이는 산방산과 해안길이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살면서 가끔 뒤도 돌아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내딛다 보면 부남코지 앞의 절벽 절경에 또 한 번 발걸음을 멈춘다. 자연이 빚어낸 절경 앞에 마음마저 경건해진다. 산 둘레를 한 바퀴 돌아 나오고 나니 어느새 도착지점까지 오게 됐고, 잠시 익숙한 풍경에 조금은 혼돈이 있었지만 이내 출발점과 멀지 않은 도착점임을 깨닫고 잠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도착지점까지 열심히 돌아온 곳이 결국은 출발지점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이번 여행에 참 의미를 일깨우는 듯하다.
쉼 없이 한달음에 달려 한차례 낮은 오름을 더 오르고 나서야 올레 지도를 봤다. 생각보다 쉼 없이 걸어온 걸음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길이 아쉽다. 조금은 지친 몸을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쯤 다시 펼쳐지는 해안길이 눈에 들어왔고, 그늘과 커피 한잔이 생각이 나서 찾은 곳이 운진항의 한 카페였다.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온 내 21년 직장생활에서 주는 이번 여행의 쉼표처럼 오늘 하루 코스 완주를 위해 열심히 걸었던 내 발과 더위에 지친 내 몸에게 잠시나마 시원한 그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의 여유를 선사했다.
카페 안에는 젊은 커플들과 가족단위 사람들로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알고 보니 내가 찾은 카페는 요트 여행을 신청한 사람들의 집합 장소였고, 잠시 대기하다 요트를 타기 위해 출발하는 곳이었다. 다들 들뜬 모습에 여행은 저마다 경로와 함께하는 구성원이 다를지언정 설렘과 행복감은 모두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벗어놓았던 재킷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입고, 녹지 않은 얼음을 한 번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너무도 아쉬운 길 위에서 난 다시 한번 발길을 내딛는다. 모든 일들이 다 그렇듯이 길 위에서 행복했던 여행자에게도 그 길의 끝은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이 새삼 아쉽게 느껴진다.
2Km가 남지 않은 거리를 한 걸음에 걸어가면서 눈에 보이는 해안길 위에 집들이 자연과 잘 어우러진 우리 사는 모습 같다. 마지막 길을 조금 더 가면 마지막으로 바다가 없는 길 위에 제주 특유의 검은 흙밭들이 돌담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고, 심어져 있는 생명들에게 쏟아지는 스프링클러의 물 채는 소리가 경쾌한 음악소리같이 들린다. 시월 하고도 마지막 주임에도 유채꽃 만발하게 핀 모습을 보면서 마지막 발걸음에 힘을 더 보태본다.
10코스 도착점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조금은 번화한 거리 안에 있었다. 오늘 아침 올레 앞에 서기 전만 해도 이 건물과 사람이 많은 곳에서 벗어났지만 몇 시간 만에 이 풍경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총 거리 15.6Km, 걸음 수로는 약 2만 2 천보쯤 되는가 싶다. 하지만 실제 걸음 수로는 2만 5 천보가 훌쩍 넘게 걸었다. 자주 산책을 하는 편이지만 새로 산 트레킹화가 익숙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장거리를 걸었던 탓인지 양쪽 새끼발가락이 욱신 거린다. 도착시간은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렀다. 오후 3시를 조금 넘은 시간 미리 예약해 놓은 숙소 체크인 후 샤워부터 서둘렀다. 오늘 남은 하루가 내가 서두르는 시간보다 빨리 갈까 봐. 그러다 서두르는 내 모습에 '피식' 또 웃고 말았다. '천천히'와 '여유롭게'를 마음속에 담고서 걸었던 올레길 위에서 평소 습관처럼 또 서두르는 내 모습이 조금은 웃펐다.
그렇게 흘린 땀을 씻고 나와 숙소 주변을 돌아보니 주변에 구경할 곳이 더 있었다. 그중에 재래시장인 '대정 5일 시장'이 있었고, 마침 내가 찾은 날이 장날인 듯 보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이곳저곳을 돌며 시장 구경을 했고, 그리 큰 시장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 빼고는 모두 있었다. 돌아다니며 모자도 한 번 써보고, 제주도 특산 오메기떡 판매처도 있어서 떡을 보며 좋아할 우리 집 모녀를 생각하며 떡 선물세트도 잊지 않았다. 오후 4시가 넘어가니 시장 상인들은 다들 펼쳐놓은 짐을 싸며 내일을 준비했고, 난 서둘러 시장 중앙에 있는 국숫집에 들어가 저녁으로는 이르지만 걸었던 고단함도 달래고, 오늘 하루를 복귀도 할 겸 자리를 잡았다. 일만 원의 행복한 상으로 고기국수와 막걸리 그리고 세, 네 가지의 반찬이 밥상을 채웠고, 내 배와 마음을 채우기엔 충분한 맛과 양의 음식이었다.
배는 어느 정도 차고, 막걸리 한 병에 조금은 취기가 오른 얼굴로 식당을 나섰다. 길어지는 그림자가 곧 해가 저물 시간임을 알렸고, 서둘러 편의점에 가 따뜻한 캔 커피 하나를 사들고 숙소 앞 노을 명당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직 일몰 시간까지는 이십여분 남았지만 벌써부터 빨개지는 노을빛에 하늘과 바다 빛깔은 불과 몇십 분 전 푸르던 가을바다와 하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연출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나섰던 여행지에서 잊히지 않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 가족 생각이 난다. 흘러넘치는 붉은빛이 아름다워 서둘러 아내에게 영상통화를 걸었고, 전화기 너머로 들여오는 아내의 탄성에 오늘 하루의 피로가 함께 씻겨 나간다.
그렇게 이십여분을 지켜보고 나서야 하루를 밝게 비췄던 해는 오늘 할 일을 다 한 것이 뿌듯했는지 아주 작은 붉은 여운만 바다에 남겨놓고 모든 자취를 감췄다. 까무룩한 제주 올레 위에서 저무는 해를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오늘이 처음인 듯하다. 내일 길 위에서 다시 만날 새로운 제주가 기다려지기에 오늘 하루 잘 걸었다고 토닥토닥하며 하루를 끝낸다. 마음이 조금 아쉬웠는지 아니면 흘러가는 제주의 시간이 아쉬웠는지 늦은 시간에 다시 모슬포항 식당가에 나와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며 혼자 소주잔을 기울일 곳을 찾았다. 다른 식당에 비해 손님이 적은 어느 식당 앞에 멈춰 서서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다'라고 마음을 먹고 난 식당으로 들어섰다. 갈치조림 대신 꽃돔 조림. 식당 사장님의 강력 추천으로 살 많고 적당히 짭조름한 녀석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여본다. 줄어드는 소주병의 술처럼 오늘 남은 시간도 차츰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제주 올레를 위해 한 잔. 열심히 걸어준 내 발을 위해 다시 한 잔. 양쪽 발가락이 검게 멍들며 통증은 있지만 오늘 하루를 얻은 영광의 상처쯤으로 생각하면 그뿐.
*제주 1일 차 올레 10코스를 걸으면서 쓴 일상의 이야기입니다. 제주 2일 차 올레 이야기는 다음 주 월요일에 발행할게요